‹ 목록으로 반년 시한부 영주

4화

다음 날 아침, 나는 결심한 대로 노식 할아범을 집무실로 불렀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유난히 눈에 부셨는데, 그게 어쩐지 내 결심을 응원하는 신호처럼 느껴졌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얼마나 순진한 상상을 했는지 곧 알게 될 것이었다. 밤새 머릿속으로 대사를 몇 번이나 연습했는지 모른다. 이건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니까 예의를 갖춰야 한다, 하지만 물러서는 티는 내지 말아야 한다, 그런 계산을 하며 거울 앞에서 표정까지 연습했으니 이쯤 되면 좀 우습기도 하다. 전장에서는 화살이 날아와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던 내가, 늙은 집사장 앞에서 이러고 있다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식 할아범 앞에만 서면 심장이 살짝 빨라진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할아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최대한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노식 할아범은 늘 그렇듯 미묘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에 벌써부터 뭔가를 예감한 듯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저 할아범, 눈치가 귀신같단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벌써 팔짱을 끼고 있었다. "영지의 행정을 전적으로 할아범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나는 단숨에 말을 쏟아냈다. "저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거기서 왕국을 위해 싸우는 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고, 이곳은 할아범이 저보다 훨씬 잘 다스릴 겁니다." 말을 마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마치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후련함은 채 몇 초를 가지 못했다. "안 됩니다." 노식 할아범의 대답은 단칼이었다. 나는 순간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이 늙은이가 지금 영주 명령을 거부하는 건가? 아니, 명령이라기보다는 부탁이었으니 거부할 수도 있는 거긴 한데, 그래도 이렇게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잘라낼 줄은 몰랐다. "안 된다고요? 어째서입니까." 나는 되물었다. 전장에서는 명령 한 번이면 병사들이 즉시 움직였는데, 이 늙은 집사장은 내 결정을 이렇게 간단히 거부하고 있었다. 참 나, 여기서는 계급장이 안 통하는구나. "영주님, 이 영지의 주인은 영주님입니다." 노식 할아범이 지팡이를 바닥에 짚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가 아무리 행정을 잘 처리한다 한들, 결정권자가 없는 영지는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영주님이 자리를 비우시는 순간, 저 밑에 있는 놈들이 어찌 나올지 아십니까? 서로 힘겨루기하다가 곳간부터 축내기 시작할 겁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그 속에 담긴 단호함은 검보다 예리했다. "그렇다면 결정은 할아범이 내리고, 저는 서명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그럴싸한 논리라고 생각했는데, 노식 할아범은 잠시 침묵하더니, 처음으로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영주님, 그런 식으로는 이 위기를 넘길 수 없습니다." 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진짜로 필요한 건 영주님이 이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도장이나 찍어대는 허수아비 노릇을 하시려거든 애초에 영주 자리를 받지 마셨어야지요. 도망치듯 전장으로 돌아가시는 건 이 영지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버린다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나는 순간 화가 났지만, 그 화가 부당한 화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뭐라고 쏘아붙이려고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다물었다. 이럴 때 보면 노식 할아범이 나보다 더 영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질내면서 반박이라도 하고 싶은데, 저 말이 맞는 걸 알아버려서 더 짜증이 난다. 그 순간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식 할아범과 나는 동시에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타이밍은 뭔가. 하늘도 내 편이 아닌 게 확실하다. "저건..." 노식 할아범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평소엔 웬만한 일에도 눈썹 하나 안 움직이는 노인네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더 불안했다.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열흘 후라고 했던 서찰의 내용이 떠올랐고,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다. "설마 벌써 도착하신 겁니까." 나는 다급하게 물었지만, 이미 창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마차 문양이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대윤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저 문양을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왕국에서 저 문양을 달고 다닐 수 있는 가문이 몇 개나 되겠는가. 나는 정신없이 겉옷을 걸치며 뛰어나갔다. 열흘이라고 했는데 왜 지금 도착한 건지, 서찰이 잘못 온 건지, 아니면 일정이 변경된 건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가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창고 정리라도, 성벽 보수라도 어떻게든 흉내라도 냈을 텐데. 지금 이 상태로 보이면 그야말로 영지가 이 지경이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정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차 문이 열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게 첫눈에 반한 감정인지 아니면 그냥 순수한 충격인지 구분이 안 됐지만, 확실한 건 그 사람의 존재감이 남달랐다는 것이었다. 윤서은.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표정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처럼, 무심하고 냉정한 시선이었다. 은발에 가까운 밝은 금발머리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눈동자는 얼음처럼 투명한 청색이었다. 소문으로 들었던 얼음의 공녀라는 별명이 과연 헛말이 아니었구나 싶었다. 옷차림 하나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긴 여정을 왔을 텐데도 구겨진 곳 하나 없는 드레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것 같은 장갑. 저게 사람인가 조각상인가. 심지어 마차에서 내리는 동작조차 흠잡을 데가 없었다.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할 새도 없이 서 있는 스스로가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청하 남작이십니까." 그녀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놀랄 만큼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나는 순간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헛기침을 했다. "그, 그렇습니다. 이신후라고 합니다."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갖췄지만, 속으로는 이미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이 여자, 진짜 소문대로 얼음장이잖아. 이런 눈빛으로 사람을 보는데 어떻게 다들 그 앞에서 태연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예정보다 일찍 오셨군요."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 같은데, 그녀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다. 눈치챘다 해도 티를 낼 사람 같지도 않았고. 윤서은은 나를 잠시 응시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열흘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요." 그 말의 의미를 나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여유가 없다니, 그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나랏일이 그렇게 바빠서 감독하러 오는 일정도 앞당겨야 할 정도였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지. 그녀는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성 안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영지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녀가 그 소문을 확인하러 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걱정스러웠다. 등 뒤에서 노식 할아범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저 노인네도 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미 다 끝났다는 생각이 스쳤다. 열흘이나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 텐데, 그 열흘을 하루도 못 채우고 이렇게 서 있게 될 줄이야. 저 얼음장 같은 눈동자가 내 뒤편의, 여기저기 무너져가는 성벽을 훑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