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열흘. 겨우 열흘이라니.
나는 서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종이 위에 적힌 글자들이 눈에는 들어오는데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혼약녀가 예정보다 앞당겨 온다고? 원래는 두 달 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게 갑자기 열흘로 줄어들었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재정 위기 해결책도 못 찾은 상황에서 이런 소식이 날아오다니, 이게 무슨 이중 재앙인가 싶었다. 하늘이 나를 놓고 무슨 심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순서라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노식 할아범은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장 급한 건 재정 문제입니다. 영주님, 이제라도 장부를 직접 확인해 보시죠."
혼약녀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는 뜻인가. 하긴, 열흘 뒤에 올 사람보다 지금 당장 무너지고 있는 영지가 먼저겠지. 나는 그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이걸 다 언제 정리하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영주라는 게 이런 건가. 안이 다 타들어가도 밖으로는 멀쩡한 표정을 지어야 하는 자리.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나는 처음으로 청하 영지의 전체 장부를 펼쳐 보았다. 그동안은 노식 할아범이 요약해 준 내용만 듣고 서명만 했었는데, 이제는 직접 숫자들과 마주해야 했다. 장부라는 게 이렇게 두꺼울 줄은 몰랐다. 종이를 넘길 때마다 먹 냄새가 훅 올라오는데, 그 냄새조차 어쩐지 사람 목을 조르는 느낌이었다.
첫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부터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곡물 창고의 재고량이 예상보다 훨씬 적었고, 그마저도 절반은 이미 병사들의 식량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남는 것으로는 겨울까지 농민들을 먹일 수도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어가며 몇 번이나 다시 계산해봤다. 혹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닐까 해서. 그런데 아무리 다시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부족하다. 심지어 많이 부족하다.
"할아범, 이 곡물 재고, 이게 정말 맞는 숫자입니까?"
"맞습니다. 지난 가을 수확이 워낙 좋지 않았습니다. 전쟁 때문에 일할 손이 부족했으니까요."
전쟁, 전쟁 때문이라니. 나도 그 전쟁에 있었던 사람인데, 여기서도 그 전쟁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게 드리워져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다음 페이지에는 인력 문제가 적혀 있었다. 전쟁 중에 젊은 남자들이 대부분 징집되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남은 건 노인과 여자, 아이들뿐이었다. 이대로는 봄 파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는 노식 할아범의 주석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다시금 하늘이 노래지는 걸 느꼈다. 이게 벌써 두 번째인가. 이런 감정에도 익숙해지는 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매번 더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인력이 부족하면, 다른 영지에서 사람을 빌려올 수는 없습니까?"
"빌려온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영지들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게다가 사람을 빌려오려면 그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영지에 그럴 여력이 있습니까?"
없다. 없는 걸 나도 알고 할아범도 알고 있었다. 그저 확인 사살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자금 문제였다. 병사들의 급료, 성벽 보수비, 세금으로 걷어야 할 돈과 이미 나가야 할 지출을 비교한 표를 보는 순간, 나는 완전히 말을 잃었다. 지출이 수입의 세 배에 달했다. 세 배라니. 이건 반년이 아니라 석 달 안에 파산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숫자를 보고 있는데도 눈앞이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손바닥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할아범, 이거 진짜 반년이나 버틸 수 있는 겁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고 싶었는데,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노식 할아범은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버틴다는 표현이 정확할 겁니다. 버티는 것과 회복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지요."
버티는 것과 회복하는 것이 다르다니, 그 말이 어쩐지 더 무섭게 들렸다. 버틴다는 건 결국 언젠가 무너진다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회복은 대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건가.
나는 그 말에 온몸이 굳어버리는 걸 느꼈다. 식량도, 인력도, 자금도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이건 그냥 위기가 아니라 재앙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장에서는 이런 상황이면 이미 후퇴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병력이 부족하고, 보급이 끊기고, 자금이 바닥나는 삼중의 위기 속에서 진영을 지킨다는 건 자살행위였으니까. 실제로 나는 전장에서 그런 진영을 몇 번이나 봤었다. 버티다 버티다 결국 전멸당하는 부대들. 지휘관이 판단을 늦추면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그런 광경.
그런데 여기서는 후퇴할 곳이 없었다. 이 영지가 무너지면, 그다음은 뭘까. 나는 그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자꾸 같은 문장만 되뇌었다. 여기서 도망칠 곳은 없다.
"할아범." 나는 장부를 덮으며 그를 불렀다. "제가 여기서 뭘 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검을 쥐는 법은 알아도, 곳간을 채우는 법은 몰랐다. 적을 베는 법은 알아도, 세금을 걷는 법은 몰랐다. 이런 무력함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전장에서는 적이 눈앞에 보이면 그냥 베면 됐는데, 여기서는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노식 할아범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영주님이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영주님이어야 합니다."
그 말이 어쩐지 위로처럼 들리다가도, 곧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정이라니. 뭘 결정하라는 건가. 뭘 어떻게 해야 이 삼중 위기를 풀 수 있단 말인가. 검을 뽑는 결정이야 수백 번도 해봤다만, 곳간이 비어가는데 뭘 어떻게 결정하라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정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를 들면, 세금을 더 걷을지, 아니면 곡물을 아껴서 배급할지. 병사를 줄일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자금을 끌어올지. 이런 것들 말입니다."
말은 쉽지만, 그 하나하나가 사람의 목숨과 직결되는 결정이었다. 세금을 더 걷으면 농민들이 굶고, 배급을 줄이면 병사들이 굶고, 병사를 줄이면 성이 뚫린다. 이건 답이 없는 문제 아닌가. 아니, 답이 있긴 있는데 그게 전부 최악 중에서 그나마 나은 걸 고르는 선택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침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거기서는 최소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명확했다. 검을 들고, 적을 베고, 살아남으면 됐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게 무력감이라는 감정인가 보다, 라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전쟁 영웅이라 불리던 놈이, 이제는 서류 앞에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다니.
천장의 나뭇결이 눈에 들어왔다. 저 나뭇결처럼 복잡하게 엉킨 문제들을, 나는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머리가 더 복잡해지기만 했다.
결심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노식 할아범을 불러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이 영지의 행정은 전적으로 할아범에게 맡기고, 나는 다시 검을 들고 왕국을 위해 싸우러 가겠다고. 이게 최선일 거라고,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래, 이게 맞다. 나는 검을 쓰는 사람이지, 곳간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여기 남아있어봐야 오히려 일을 더 그르칠 뿐이다.
하지만 그 결심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 그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열흘 뒤에 도착할 혼약녀가, 그 결심을 완전히 무너뜨릴 존재라는 것도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