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검을 쥐고 싶어진다. 종이 한 장을 상대로 이렇게 무력해질 줄은, 전장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적장의 목을 베고 성문을 부수던 손이, 지금은 잉크 얼룩 하나를 지우지 못해 손끝을 떨고 있다는 게 우습지 않은가. 창을 쥐면 손아귀가 단단해지는데, 붓을 쥐면 왜 이렇게 손목이 후들거리는지 나조차 이해가 안 됐다. 이게 무기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이 종이 위에 적힌 숫자들이 화살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서 그런가.
"영주님, 서명이 빠졌습니다."
노식 할아범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는데, 이게 무슨 조건반사인지 나조차 이해가 안 됐다. 적의 기습에도 이렇게 긴장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이 늙은 집사장의 목소리에는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치는 걸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화살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등을 곧게 펴고 걸었던 놈인데, 지금은 서류 뭉치 앞에서 등이 굽어드는 걸 느낀다. 이게 사람이 변한 건가, 아니면 애초에 나는 종이보다 창을 다루는 데만 재능이 있었던 건가.
"어디에 서명하면 됩니까."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물었지만, 속으로는 이 서류가 대체 몇 장째인지 세다가 포기한 지 오래였다. 오전에만 열두 장, 오후엔 그보다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정확한 숫자는 이미 내 머릿속에서 뭉개진 지 오래다. 전장에서는 적의 수를 정확히 세는 게 생존과 직결됐는데, 여기서는 숫자를 셀 필요조차 없이 그냥 무한히 쌓이는 느낌이었다.
노식 할아범이 손가락으로 짚어준 곳에 이름을 적으면서, 나는 이 남자의 눈빛이 언제나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전쟁에서 병사들을 이끌 때는 눈빛만 봐도 다음 명령이 뭔지 알았는데, 이 사람의 눈빛은 도무지 읽히지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만큼 표정 관리가 능숙한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속을 안 보여주는 성격인 건지, 몇 달을 겪어봐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서명을 마치자 그는 두꺼운 장부 하나를 더 내 앞에 올려놓았고, 나는 그 순간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대체로 틀리지 않는다는 걸 전장에서 배웠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부의 표지는 낡아 있었다. 가죽 모서리가 닳아 있는 걸 보니 이게 하루 이틀 묵은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런 걸 이제 와서 꺼내는 이유가 뭘까. 설마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던 건가.
"영주님, 지금 청하 영지의 재정이 어떤 상황인지 아십니까."
노식 할아범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숨긴 무게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솔직히 몰랐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영주라는 자리에 앉은 지 몇 달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자리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쥐던 손으로 인장을 찍고, 병사들을 지휘하던 목소리로 소작농들의 세금을 논해야 한다는 게, 아직도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그렇게 심각합니까."
나는 짐짓 여유로운 척 되물었지만, 손바닥에는 이미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라는 생각이 스치자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전장에서는 화살이 빗발쳐도 눈 하나 깜빡 안 했던 놈이, 지금은 숫자 몇 개 앞에서 벌벌 떠는 꼴이라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심장이 왜 곳간이 빈다는 말에는 이렇게 요동치는 건지, 이해가 안 되면서도 어쩐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죽는 건 나 하나로 끝나는 일이지만, 곳간이 비면 죽는 건 나 하나가 아니었다.
"반년입니다."
노식 할아범이 짧게 말을 던졌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반년이라니요."
"이대로 가면 반년 안에 청하 영지의 곳간이 완전히 비게 됩니다. 그때는 병사들 급료도, 농민들에게 나눠줄 곡식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정말로, 문자 그대로 시야가 노랗게 물드는 것 같았다. 이게 그 유명한 절망이라는 감정인가. 나는 전장에서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이렇게 하늘이 노래진 적이 없었는데, 지금 서류 한 장 앞에서 그 경험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개연성 없는 인생이 아닌가 싶었다. 창에 찔릴 뻔했을 때도 이 정도로 정신이 아득해지진 않았는데, 숫자 몇 개가 이렇게 사람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 알았다.
반년. 반년이면 대충 두 번의 계절이 바뀌는 시간이다. 겨울이 오고, 그다음 봄이 오기 전에 이 영지는 아사 직전으로 몰릴 거라는 뜻이었다. 병사들이 창을 놓고 급료를 요구하며 항의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고, 농민들이 마른 논밭을 붙잡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상상은 언제나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전장이라면 지금 당장 진영을 정비하고, 병력을 재배치하고, 후퇴선을 확보하는 게 정답일 텐데, 여기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곳간을 채우는 데도 무슨 전략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그냥 하늘에 빌어야 하는 건지, 나는 정말로 몰랐다.
노식 할아범은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이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듯해서, 나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영주님이 직접 장부를 살펴보시고, 지출을 줄일 곳과 늘려야 할 수입원을 찾아야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씨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나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전장에 끌려 나가 창을 쥐는 법을 배웠지, 곡식 값을 계산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병사 열 명을 이끄는 법은 알아도, 그 열 명을 먹일 곡식을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이게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사람을 죽이는 법은 배웠는데 사람을 먹이는 법은 못 배웠다니, 이 나라의 교육 방식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허세 가득한 대답인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장부를 살펴본다고 해서 갑자기 내 머릿속에 회계 지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나는 마치 다 해낼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게 바로 허세라는 건가. 전장에서 배운 게 있다면, 겁을 먹었을 때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회계에도 적용될지는 모르겠지만.
노식 할아범은 내 대답에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는데, 그게 비웃음인지 격려인지 구분이 안 됐다. 이 남자는 늘 이런 식으로 사람 속을 뒤집어놓았다. 칭찬인지 조롱인지 모를 표정을 짓고는, 그 여운만 남기고 다음 말로 넘어가버리는 거다.
"좋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시지요."
그가 등을 돌리며 방을 나서려는 순간, 나는 문득 뭔가 더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쉽게 말을 끝낼 리가 없다는 걸, 나는 이미 몇 달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마지막에, 그것도 아무렇지 않은 척 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오늘도 뭔가 남겨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할아범."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뭔가 더 있는 거 아닙니까."
노식 할아범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에 처음으로 미묘한 그늘이 스쳤는데, 그건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평소의 그는 어떤 소식을 전하든 담담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담담함 사이로 뭔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그걸 눈치챈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영주님, 사실 재정 문제보다 더 시급한 사안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더 시급한 문제라니,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곳간이 반년 안에 빈다는 소리보다 더 급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설마 적국이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병사들이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건가. 머릿속에서 온갖 최악의 상황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지만, 심장은 이미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손끝이 저릿하고,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이런 몸의 반응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익숙한 건 전장에서 늘 느꼈던 긴장감이고, 낯선 건 그 긴장감의 원인이 적군이 아니라 저 늙은 집사장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이라는 사실이었다.
노식 할아범은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 도착하실 혼약녀에 관한 일입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예감에 휩싸였다. 재정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여기에 혼약 이야기까지 얽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인가. 곳간은 반년 안에 빌 예정이고, 나는 회계도 모르고, 그런데 이제는 혼약녀까지 들이닥친다니. 이게 무슨 겹경사인지, 아니면 겹재앙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결코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