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선유하의 손끝에서 뻗어온 불꽃이 나를 관통하려는 순간,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닿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닿았는데 아프지 않았다.
몸이 없으니 통증도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내가 무언가에 반응한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버티는 건가. 오래된 놈이구나."
그녀는 나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윕. 영혼을 먹는 마물이라고, 나를 그렇게 부른 건가.'
그 순간 여러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반가움, 슬픔, 그리고 헛웃음이 나올 것 같은 아이러니.
천 년이라는 시간을 그녀는 나를 되살리는 데 썼는데, 정작 마주한 나를 마물로 오인하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하나.'
입을 열어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영혼체에게는 성대가 없었으니까.
목이 있어야 할 자리를 더듬어봤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그저 허공을 훑는 감각만 남았다.
'몸이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할 줄이야.'
살아있을 때는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은 하나부터 열까지 낯설게 느껴졌다.
선유하가 다시 불꽃을 응축시키는 걸 보며 나는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다는 감각도 모호했지만, 어쨌든 거리가 벌어졌다.
그 짧은 틈에 나는 방 안을 눈으로—정확히는 인식으로—훑었다.
낡은 석조 탑의 내부였다. 벽마다 금이 가 있었고, 곳곳에 마법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천장 한쪽은 아예 무너져 내려 밤하늘이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별빛이 새어드는 게 오히려 을씨년스러웠다.
바닥에는 깨진 마법 도구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수정구 조각, 부러진 지팡이, 녹아내린 촛농.
'여기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반복한 걸까.'
한눈에 봐도 이 탑이 겪어온 세월이 짐작됐다. 벽의 금은 오래된 것과 새로 생긴 것이 뒤섞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시든 꽃송이가 하나 놓여 있었다. 꽃잎이 절반쯤 뜯긴 채였다.
'꽃잎을 뽑고 있었나.'
어릴 적, 마을 축제에서 봤던 아이들의 놀이가 떠올랐다.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 아니다.
그녀가 하고 있던 건 그런 놀이가 아니었다. 주문의 성공과 실패를 점치는 강박적인 의식이었다.
탁자 위에는 그런 시든 꽃이 수십 송이나 겹겹이 쌓여 말라붙어 있었다.
'저게 다 실패의 흔적이구나.'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아픈 몸도 없는데 그런 감각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꽃들 중 몇몇은 아예 재가 되어 부스러져 있었다. 술식이 폭주했을 때 함께 타버린 흔적일 것이다.
'몇 번이나 죽을 뻔했을까, 이 여자는.'
되살리는 술식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었다. 시전자의 목숨을 담보로 거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일.
선유하는 여전히 손을 들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력을 너무 오래 끌어다 쓴 탓인 듯했다.
손끝에는 화상 자국이 여러 겹으로 덧나 있었다. 새살이 돋기도 전에 다시 데인 흔적들이었다.
'저 몸으로 몇 번을 더 시도한 거야.'
옷차림도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값비싼 마법사의 로브였을 옷이, 이제는 여기저기 그을리고 해져 넝마에 가까웠다.
머리카락은 제대로 손질할 새도 없었는지 헝클어진 채 어깨에 흘러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눈만이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구나.'
"이번엔 놓치지 않아."
그녀의 눈빛에는 광기와 절박함이 뒤섞여 있었다.
'저 여유는 가짜다.'
아니, 정확히는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몸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본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니까 더 위험한 거야.'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 하는 짓은 늘 예측을 벗어나는 법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결심했다.
지금 내가 누구인지 밝히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으로 몇 가지 경우를 그려봤다. 어느 쪽도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큰 절망에 빠질 확률이 높았다.
천 년을 바쳐 되살리려던 존재가, 몸도 없이 영혼만 남은 채 나타났다는 사실.
그것이 그녀를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저 여자라면, 차라리 나를 완전히 소멸시키려 들지도 몰라.'
되살림에 실패했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아온 세월을 스스로 지워버리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런 결말은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조용히 물러나기로 했다.
정체를 숨기고, 그녀 곁에 머물면서 지켜보는 쪽으로.
숨은 보호자.
낯설고 기묘한 역할이었지만, 지금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마물 노릇이나 제대로 해줘야겠군.'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결심이었다. 죽어서까지 이런 역할을 맡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선유하가 다시 술식을 그리려는 순간, 탑 밖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둔탁한 충격음이었다. 돌과 돌이 맞부딪치는 듯한, 결코 작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들고 있던 손을 슬며시 내리고, 시선이 창가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또 왔나."
낮게 내뱉는 목소리에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그 한마디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무언가의 존재가 느껴졌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언가가, 아니면 누군가가 이 탑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탑에 나 말고도 노리는 게 있다고?'
선유하가 지팡이를 고쳐 쥐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금까지 나를 없애려던 손이, 이제는 전혀 다른 위협을 향하고 있었다.
발걸음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럼에도 자세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도 저 지경인데, 또 싸울 준비를 하는군.'
밖에서 들리는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탑의 외벽을 타고 오르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형체 없는 몸으로 그 뒤를 따랐다. 지금은 그녀를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탑 아래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이내 문 바로 앞에서 멈췄다.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붉은 빛이 심상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