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자습 시간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4교시가 끝나고 담임이 "오늘은 자습이다, 조용히 좀 해라"라는 말을 남기고 교무실로 향했을 때, 반 아이들의 절반은 이미 책상 아래로 스마트폰을 슬쩍 꺼내 들었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신작 게임 공략을 몰래 검색하고 있었는데, 그날 새로 나온 던전 패치가 얼마나 사기적인지에 대해 커뮤니티 반응을 훑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뒷자리에서는 누군가 이어폰을 나눠 끼고 웃고 있었고, 앞자리 여학생 무리는 매점에서 사 온 젤리를 몰래 까먹으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평범하고 지루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대한민국 고등학교 오후 4교시의 공기였다.
그 평범함이 깨진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담임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반 전체가 은근히 떠들썩해진 그 순간에, 교실 전체가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눈이 부시다는 감각조차 느낄 새 없이 시야가 통째로 하얗게 지워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지만 그것도 무의미한 몸짓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빛에는 뜨겁다거나 차갑다는 온도조차 없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물리적인 감각을 배제하고 오로지 시야만 지워버리는 방식이라니, 이런 건 게임에서도 본 적 없는 연출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교실 바닥이 아니라 축축한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릎에 닿는 흙의 감촉이 선명했다.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그리고 약간의 이물감이 느껴지는 그 촉감은 분명 리놀륨 바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보며 '이거 꿈 아니네'라는 생각을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놀랍게도 전부 2학년 3반 급우들이었다. 서른 명 가까운 인원이 저마다 다른 자세로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 우리 반 전체를 통째로 들어서 이곳에 쏟아놓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하는 생각보다 먼저 든 건, 어딘가 게임 속 오프닝 컷신에나 나올 법한 초록빛 풀숲과 낯선 냄새의 공기였다. 흙냄새와 풀냄새가 뒤섞인 냄새는 분명 서울 근교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 없는 종류였고, 하늘은 지나치게 맑아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아래로, 이름 모를 큰 나무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저 멀리로는 안개가 낀 산등성이 같은 것도 보였다.
[알림: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허공에 대괄호로 감싸인 문장이 둥실 떠올랐을 때, 나는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 이거 진짜였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그 감상이 지나치게 태연했다는 걸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아마 평생 읽어온 이세계물 웹소설과 게임들이 내 뇌를 이런 상황에 미리 적응시켜놓은 게 아닐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곧이어 반 아이들 사이에서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뭐야 이거!" 하고 누군가 소리쳤고, 그 목소리에 담긴 공포가 순식간에 전체로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엄마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자기 뺨을 몇 번이나 때리며 "꿈이야, 꿈이야" 하고 되뇌었다. 반장이었던 남학생은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다들 침착해, 침착하자"라고 외쳤지만, 그 목소리마저도 심하게 떨리고 있어서 별 소용은 없었다. 나는 그 아우성 속에서 낯익은 세 사람을 발견했는데, 반에서도 눈에 띄는 인기 여학생 그룹인 구서연, 윤레아, 강다홍이었다. 평소 같으면 나 같은 존재감 없는 오타쿠는 감히 눈도 맞추기 힘든 부류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들 똑같이 겁에 질린 얼굴이라는 게 묘하게 위안이 됐다. 재난 앞에서는 인기투표 순위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그 흰 빛이 다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번엔 사람 형체도 아니고 목소리만 있는, 성별도 나이도 짐작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존재였는데, 그것이 허공에서 말을 걸어오는 순간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목소리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고, 어른도 아이도 아니었다.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겹쳐놓은 듯한, 그런 이질적인 울림이었다.
[나는 세계의 균열을 관리하는 자다. 너희가 사는 세계와 이 세계는 서로 다른 시공이지만, 지금 이 세계는 붕괴 직전이다.]
[나는 너희를 이곳으로 불렀다. 이 세계를 구할 힘을 부여할 것이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대체 자기 세계가 붕괴하는데 왜 고등학생 서른 명을 뽑아왔단 말인가, 게다가 붕괴를 막을 힘을 준다면서도 정작 그 절차에 대한 설명은 한 줄도 없었으니까. 세계를 구할 힘이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여기 있어야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설명해주지 않은 채로 그냥 '부여할 것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모든 걸 뭉개버리는 태도가,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이 신이라는 존재는 자기 편의만 생각하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그게 뒤이어 나온 문장에서 확실하게 증명됐다.
[너희 각각에게 고유한 힘을 부여한다. 단, 살아남지 못하면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 문장을 읽은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살아남지 못하면'이라는 조건절이 이렇게까지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는데, 그것은 곧 이곳에서 죽으면 그대로 끝이라는 뜻이었고, 동시에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아갈 방법이 없다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살아남으면 돌아갈 방법이 생긴다는 뜻일까, 아니면 그냥 죽으면 끝이고 살아도 여기서 평생 썩어야 한다는 뜻일까. 그 짧은 문장 하나에 온갖 해석이 다 가능하다는 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반 아이들 사이에서 다시 한번 울음과 비명이 터져 나왔고, 나 역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걸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 한구석은 지나치게 냉정하게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살아남는 방법이 뭘까' 하는 생각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이 오히려 침착해진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나한테도 적용되는 걸 보니 신기하면서도 한심했다.
[각자에게 스킬이 부여되었습니다. 확인하십시오.]
그 메시지가 뜨자마자 주변에서 환호와 놀람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손끝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에 놀라 소리쳤고, 누군가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며 방방 뛰었다. 저 멀리서는 누군가의 손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가 화들짝 놀라 꺼버리는 모습도 보였고, 또 누군가는 눈앞에 뜬 문구를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이거 검술이래, 나 검술!" 하고 흥분해서 소리쳤다. 순식간에 절망의 분위기가 옅어지고, 그 자리를 신기함과 흥분이 채워나가고 있었다.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고불고하던 애들이 스킬 하나에 표정이 확 밝아지는 걸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며 내 차례를 기다렸는데, 정작 내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확인하고는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이보통님의 고유 스킬: 【크래프트】]
[크래프트란, 소지한 재료를 사용해 도구와 건축물을 즉시 제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크래프트라니,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화려한 마법이나 검술을 얻어서 흥분해 있는데, 나만 뭔가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에나 나올 법한 스킬을 받은 것 같았다. 물, 치유, 검술 같은 것들은 척 봐도 전투에 직결되는 능력이었지만, 도구와 건축물을 만드는 능력이라니 이게 대체 이 살벌한 생존 상황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싶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다들 물줄기를 쏘거나 검을 휘두를 텐데, 나는 그 옆에서 대체 뭘 해야 하나. 텐트라도 지어줘야 하나, 아니면 참호라도 파야 하나. 아무리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몬스터가 나타나면 망치 하나 들고 맞서야 하는 그림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그 상상만으로도 헛웃음이 나왔다. 이름도 참 절묘하다, 이보통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스킬조차도 지극히 보통스럽지 못하고 애매한 것이 걸린 셈이었으니까.
"...진짜 운도 없네" 하고 나는 혼자 중얼거렸는데,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새어 나갔던지 근처에 있던 구서연이 나를 쳐다봤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그 얼굴은 평소 학교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눈에 띄었지만, 지금은 그 표정에 웃음기 대신 불안이 짙게 배어 있었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도 다리를 계속 떨고 있어서,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뻔히 보였다.
"너도 이상한 거 받았어?" 하고 그녀가 물었는데, 나는 순간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어서 잠깐 대답을 못 했다. 학교에서는 마주칠 일조차 거의 없던 사이였으니까. 3년 동안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도 대화라고 할 만한 걸 나눈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뭐 그냥, 만드는 능력이래" 하고 얼버무리듯 대답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마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별 관심을 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옆에 있던 윤레아가 구서연의 팔을 붙잡으며 "언니, 나 진짜 무서워" 하고 울먹였고, 강다홍은 애써 태연한 척 "야, 괜찮아, 별거 아닐 거야" 하고 다독였지만 정작 자기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세 사람 사이의 그 짧은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자니, 화려한 스킬을 받은 사람들도 결국 나만큼이나 겁에 질려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됐다.
그 순간, 저 멀리 숲 쪽에서 낮게 울리는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의 것인지 몬스터의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 소리에 반 전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조금 전까지 스킬을 신기해하며 웅성거리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싹 가라앉았다. 나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예감을 느꼈다. 그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울림이 이어지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고, 몇몇 아이들은 이미 뒷걸음질을 치며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이거, 진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숲의 나무들이 흔들리며 뭔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낙엽을 짓밟는 무거운 발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섞여 드는 짐승의 거친 숨소리까지. 크래프트라는 애매한 스킬을 받은 채로 이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그제야 뼈저리게 실감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