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차가운 금속 냄새와 인공적인 조명 냄새가 코끝을 스치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퇴근길 지하철 승강장, 노란 안전선 너머로 술 취한 사내 하나가 후배인 윤서아의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별생각 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또 저 새끼구나.' 몇 주 전부터 회사 앞을 배회하던 스토커라는 건 이미 사무실에 다 퍼진 소문이었고, 서아는 그 인간 때문에 야근을 해도 혼자 퇴근하지 못했다. 나야 뭐, 딱히 정의감이 넘쳐서 나선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못 본 척 지나칠 만큼 뻔뻔하지 못했을 뿐이고, 마흔셋 먹은 대리라는 직급이 그 정도의 오지랖은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봐요, 이러시면 곤란한데." 내가 그렇게 말하며 사내의 팔을 붙잡았을 때, 그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뭐라 소리를 질렀고, 서아는 뒷걸음질 치다 발이 꼬여 넘어질 뻔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문제는 그 손이 서아를 밀어내는 대신 나 자신을 선로 쪽으로 딸려 보내는 방향으로 작동했다는 사실이었다. 균형을 잃는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번 달 카드값, 아직 못 산 어머니 생일 선물,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마감해야 하는 보고서. 뒤늦게 열차의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밀려들었고, 그 순간 나는 참으로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흔 넘어 이런 식으로 죽는구나, 퇴사도 못 하고, 대출도 다 못 갚았는데. 그런 실없는 계산을 하는 사이 시야가 하얗게 타올랐고,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도, 통증도, 심지어 두려움조차도 없었다. 그저 하얀 정지 화면 같은 것이 전부였다.
다시 감각이 돌아온 건 얼마나 지난 뒤였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뜨자 천장에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백색 석고가 보였는데, 그 문양은 회사 화장실 타일 무늬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했고, 넝쿨과 새의 형상이 촘촘하게 얽혀 있었다. 은은한 향유 냄새가 방 안을 채우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와 낮은 새소리가 들려왔다. '천국인가, 아니면 병원 특실인가.' 나는 그렇게 자문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는데, 팔다리가 너무 짧고 가벼워서 순간 당황했다.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낯설었다. 마흔셋 몸뚱이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는데, 지금 이 몸은 이불 한 자락을 젖히는 것조차 어색할 만큼 가볍고 작았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었을 때, 나는 그것이 마흔셋 먹은 회사원의 손이 아니라 대략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의 손이라는 걸 깨닫고 숨이 턱 막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앙증맞고, 손톱 밑에는 며칠 전 흙장난이라도 한 듯 옅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이거 무슨 상황이지.' 나는 몇 번이나 손을 뒤집어 보고 쥐었다 펴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침대 옆 커다란 거울로 비틀비틀 걸어가 들여다본 얼굴은, 은발도 아니고 붉은 머리도 아닌,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낯선 이목구비를 가진 소년의 얼굴이었다. 눈은 옅은 갈색이었고, 얼굴선은 아직 젖살이 남아 동글동글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가늘게 떨렸지만, 나는 애써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해 보려 했다. 이런 건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이었다. 이세계, 환생, 혹은 회귀 — 그런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웹소설 좀 읽어봤다고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정작 눈앞에 닥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속이 울렁거렸으니까.
방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재빨리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었는데, 하필 그 동작이 너무 어색해서 스스로도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여섯 살짜리가 이렇게 신중하게 움직이면 더 의심스럽지 않을까.' 나는 이불 속에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연습해 보려 했지만, 낯선 얼굴 근육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은발 금안의 여인이 들어왔는데, 그 여인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 손은 차가웠지만 떨리고 있었고, 며칠 밤을 제대로 못 잔 사람 특유의 붉게 충혈된 눈이었다. "한별아, 이제 정신이 드는 거니? 사흘 동안 열이 내리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그 목소리에 담긴 절박함이 진짜라는 걸 느끼면서, 나는 속으로 이 몸의 원래 이름이 '이한별'이라는 것과 이 여인이 내 어머니라는 사실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했다. '박정훈으로 마흔셋을 살다가 이한별로 여섯 살을 다시 사는 건가.' 나는 그렇게 정리하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아이답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어머니……." 그 한마디를 뱉는 순간, 목소리가 낯설게 갈라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이 삶이 결코 짧은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목소리는 가늘고 높았고, 발음마저 어딘가 어설프게 새는 느낌이었다. 마흔셋 평생 써온 발성 근육이 이 작은 성대에는 전혀 맞지 않았던 탓이다.
여인 — 강윤희라는 이름을 그녀 스스로 밝혔다 — 은 나를 끌어안고 한참을 놓지 않았는데, 그 온기가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온기였지만, 사람이라는 존재가 사람을 안는 감각 자체는 어디서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에서 나는 은은한 백합 향과 옷감의 서늘한 감촉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열이 심해서 의원님이 사흘 밤낮을 지켰단다. 다행히 큰 후유증은 없다고 하셨으니……."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내 이마를 짚었을 때,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슬쩍 곁눈질했는데, 붉은 지붕과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정원,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분수,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성벽까지 — 이건 아무리 봐도 서울 어디에도 없는 풍경이었다. 정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복장도 하나같이 낯설었다. 하녀로 보이는 이들은 목까지 올라오는 긴 치마 차림이었고, 정원사인 듯한 남자는 허리에 낫 같은 도구를 차고 있었다. '귀족가라도 되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침을 삼켰는데, 그 순간 방문이 다시 열리며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아이가 깨어났다고 들었습니다만." 붉은 머리의 젊은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와 침대 곁에 섰는데,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날카로워서 나는 순간 몸이 굳는 걸 느꼈다. 그는 딱딱한 상의 위에 견장 같은 것을 달고 있었고, 걸음걸이 하나하나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강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 몸짓만으로도 이 남자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한별. 몸이 나으면 가문 회의에 참석해야 할 것 같구나." 목소리에는 다정함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고, 그저 사실을 통보하는 듯한 건조함만 있었다. 강윤희가 뭐라 말을 덧붙이려 했지만, 그는 이미 뒤돌아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문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심상치 않아서, 나는 이 삶이 그저 조용히 회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불 속에서 손끝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여섯 살짜리 몸으로 대체 무슨 '가문 회의'에 불려가야 한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