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밤, 도현은 두 번째 던전으로 향했다.
박지호와 정민우가 건넨 편지의 내용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종이 위에 적힌 문장들이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윤재의 이름. 묵린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던, 어딘가 조심스러운 경고들.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서윤재의 곁에는 다가갈 수 없었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벽은 분명히 존재했다. 묵린의 상태를 직접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였다.
도현은 편지를 다시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건 지난 몇 달 동안 그가 몸으로 배운 사실이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G랭크에서 F랭크로. 그다음, 그다음. 한 걸음씩.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그저 지금 자신의 두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부터 시작하는 것. 그게 그가 세운 유일한 원칙이었다.
이번 던전은 첫 번째보다 조금 더 깊었다. 마을에서 반나절을 걸어야 도착하는 폐광이었다. 광물을 캐던 광부들이 몬스터의 습격으로 버리고 간 곳이라고 했다. 접수처의 직원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G랭크 던전다운 사고였다는 듯이.
도현은 혼자 입구에 섰다.
입구를 막고 있던 나무 판자는 이미 반쯤 뜯겨 있었다. 누군가 먼저 다녀간 흔적이었을까, 아니면 오래전부터 방치된 흔적일까. 알 수 없었다.
다른 모험가들과 팀을 짜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혼자 감을 되찾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등을 맞대고 싸우는 법은 나중에 익혀도 될 것 같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두 팔과 두 다리가 어디까지 버텨줄 수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동굴 안은 어두웠다. 벽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흙은 축축했다. 신발 밑창을 통해 그 습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냄새가 났다.
습기 찬 흙냄새, 오래된 철 냄새,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옅은 부패의 냄새.
익숙한 던전의 냄새들이었다. 첫 번째 던전에서도 맡았던, 어디를 가나 비슷하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냄새.
그런데 지금 코끝에 닿은 것은 분명 다른 무언가였다.
짐승의 냄새였다. 그것도 무리를 지은 짐승의 냄새.
털가죽 특유의 누린내와, 그 사이로 섞여드는 침 냄새. 한 마리의 것이 아니었다. 여러 개체가 뒤섞인, 층층이 쌓인 듯한 냄새였다.
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폐광 안내서에는 슬라임과 초급 고블린만 기록되어 있었다. 접수처에서 받은 종이에도, 마을 사람들의 소문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이런 냄새는 예상 밖이었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그는 검을 뽑았다. 검날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반사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갈림길에서, 도현은 오른쪽 통로를 선택했다. 왼쪽보다 냄새가 옅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하나, 둘, 셋. 여섯 개까지 세다가 도현은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
숫자를 세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많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울프형 몬스터였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종류. 낮게 몸을 웅크린 채,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움직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사냥에 익숙한 짐승들의 자세였다.
G랭크 던전에는 나오지 않아야 할 몬스터였다.
도현은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가운 돌벽의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울프들이 낮게 그르렁거리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여섯 개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숨을 멈췄다.
혼자였다.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묵린도 없었다.
그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늘 누군가가 옆에 있었다. 서윤재가, 혹은 묵린이.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둠 속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도현뿐이었다.
도현은 검을 고쳐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가장 앞선 울프가 먼저 달려들었다. 도현은 몸을 옆으로 굴리며 검을 휘둘렀다. 놈의 옆구리가 갈라졌지만,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상처 입은 짐승이 더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두 번째 울프가 뒤에서 덮쳐왔다. 도현은 재빨리 몸을 낮췄다. 이빨이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등줄기에 서늘한 감각이 번졌다. 놓쳤다면 목덜미가 그대로 물렸을 거리였다.
세 번째, 네 번째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도현은 벽을 짚고 몸을 틀었다. 어깨가 벽에 부딪히며 통증이 번졌다. 팔에 힘이 순간적으로 풀리는 걸 느꼈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지금 물러서야 한다고. 하지만 등 뒤는 이미 벽이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의 감각이 이미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 울프가 등 뒤에서 달려드는 순간, 도현은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주변의 소리가 멀어졌다. 울프들의 거친 숨소리도, 발톱이 흙바닥을 긁는 소리도 모두 아득하게 물러났다. 대신 자신의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리고 그 심장 소리 위로, 아주 미약한 진동이 겹쳐졌다.
웅—
온몸의 감각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등 뒤에서 달려드는 울프의 움직임이, 마치 느린 그림처럼 하나하나 보였다. 근육이 수축하는 순간, 앞발이 지면을 박차는 순간, 턱이 벌어지는 순간까지 모두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검을 위로 쳐올렸다. 검날이 울프의 목을 정확히 베었다.
짐승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도현은 그 자리에 잠시 멈춰 섰다. 손끝이 떨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순간을 그저 위기의 순간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을 뿐이라고. 그런데 도현은 그 짧은 순간,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세상이 잠시 다른 속도로 흘러가는 것을.
그건 눈으로 보는 것과는 달랐다. 눈꺼풀 안쪽에서,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대신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남은 울프들이 잠시 물러섰다. 동료의 죽음에 경계하는 눈치였다. 붉은 눈동자들이 흔들리며 서로의 거리를 재조정했다.
도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음 울프를 향해 몸을 던졌다.
싸움은 오래 이어졌다.
도현의 몸 곳곳에 작은 상처들이 늘어갔다. 옷은 흙과 피로 얼룩졌다. 팔뚝에 길게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 손목을 타고 검 손잡이까지 적셨다. 그런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다른 한 마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숨이 가빠졌다. 팔의 감각이 점점 무뎌졌다. 하지만 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또 한 번, 그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아주 짧게, 스치듯이. 하지만 그 순간 도현의 몸은 다시 한번 위험을 피해냈다. 정확히 어떻게 피했는지는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지막 울프가 쓰러졌을 때, 도현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동굴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숨소리뿐이었다. 그 숨소리마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섯 마리의 울프가 모두 쓰러져 있었다. 어둠 속에 널브러진 짐승들의 몸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핏자국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혼자서,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해낸 일이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승리감보다 다른 감정이 더 크게 자리했다.
그 순간의 감각. 시간이 느려지고, 모든 것이 선명해지던 그 순간.
그건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었다.
묵린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처음이었다.
도현은 검을 바닥에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약하게 떨렸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만져보았다. 아무 이상도 없었다. 눈꺼풀도, 눈동자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방금 본 것은 분명 평범한 시야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자신의 안에서, 아니면 자신을 통해서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동굴을 빠져나온 것은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동쪽 끝이 회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그 위로 옅은 주황빛이 번지고 있었다. 도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온몸의 상처들이 새삼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팔뚝의 상처는 이미 피가 굳어 옷에 눌어붙어 있었고, 어깨는 여전히 뻐근하게 저렸다.
걸음을 옮기던 그의 발치에, 문득 낯선 문양이 새겨진 작은 돌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울프들이 있던 자리 근처, 흙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것이었다.
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주웠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돌이었다. 표면에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이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낡고 흐릿했지만, 분명한 형태였다. G랭크 던전에서 나올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도현은 손끝으로 그 문양을 천천히 더듬었다. 표면은 매끈하지 않았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오래전에 새겨넣은 흔적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문양이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서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도현은 그것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 그는 다시 그 낮은 진동을 느꼈다.
웅—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밝아오는 하늘에는 새 한 마리, 구름 한 점뿐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호가 점점 또렷해지고 있다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그 감각은 소리도 아니고, 냄새도 아니었다. 그저 피부 아래, 뼈 어딘가에서 울리는 진동 같은 것이었다.
본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방금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도현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그 짧은 순간의 감각이, 앞으로의 길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이라는 예감만은 분명했다.
주머니 속 돌조각의 무게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마치 그 작은 조각 하나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폐광의 입구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곧 알게 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