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숲 초입, 나무 그늘 아래였다.
서윤재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빛이 그의 어깨 위에서 흔들렸다. 도현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앉아."
서윤재가 옆의 넓적한 바위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도현은 앉지 않았다.
"할 얘기가 뭔데."
서윤재는 잠시 도현을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 온화한 표정이었다. 문제는, 그 온화함이 언제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었다. 마치 잘 다듬어진 가면 같았다. 도현은 그 가면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안 지 오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파티 재편성을 생각하고 있어."
"재편성?"
"인원이 너무 많아. 효율이 떨어지고 있어."
도현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굴 빼겠다는 거야."
"그건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아직?"
"결정된 건 없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새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갔다. 도현은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서윤재의 시선이 자신을 스캔하듯 훑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값을 매기는 상인의 눈빛 같았다. 발끝에서 어깨까지, 그리고 다시 눈으로. 무엇을 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시선이 불쾌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부터 물어볼게."
서윤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밤에 묵린한테 갔었지."
도현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하지만 표정은 그대로였다. 목소리도 흔들리지 않게 신경 썼다.
"산책이었어."
"산책."
서윤재가 그 단어를 되풀이했다. 웃음기가 살짝 섞여 있었다. 그 웃음이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묵린이 요즘 좀 이상하다는 건 너도 느꼈을 거야."
"느꼈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정말 몰라?"
서윤재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도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목소리 하나에도 사람의 속내가 묻어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뭘 묻고 싶은 거야, 윤재야."
서윤재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시선은 여전히 도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묵린이 반응하는 대상이 나 하나였으면 좋겠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나뭇잎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아갔다.
도현은 그 침묵 속에서 무언가가 결정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감각이었다. 오래전, 처음 서윤재와 파티를 짰을 때는 이런 눈빛이 아니었다. 그때는 서로 웃으며 등을 맞대던 시절이었다.
"용왕의 맹우에서, 오늘부로 넌 제외야."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예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에도 마음이 준비되지 않는다는 걸, 도현은 처음 알았다.
"이유는."
"파티 재편성."
"방금은 아직 정해진 게 없다고 했잖아."
"지금 정해졌어."
서윤재는 나무에서 등을 떼며 도현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거리가 가까워졌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다.
"솔직히 말할게. 넌 실력이 없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알고 있었지."
"그런데도 여기까지 올라온 건 묵린 덕분이야. 그건 너도 알잖아."
"알아."
"근데 요즘 묵린이 이상해졌어. 누구 때문인지는 몰라도."
도현은 그 말을 듣고서야 서윤재의 진짜 의도를 이해했다. 이건 단순한 재편성이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묵린의 반응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을 셋이나 쫓아내는 결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지호랑 민우는."
"같이 나가."
"이유는 같아?"
"파티에 남자는 넷이면 충분해. 아니, 이제 나 하나면 충분해."
도현은 그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서윤재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는 예전의 친구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권력을 쥔 자의 계산만이 남아 있었다. 도현은 그 계산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했다. 처음부터였을까, 아니면 묵린이 나타난 이후부터였을까.
"짐 챙길 시간은 줄 거지."
"오늘 안에 떠나."
"묵린한테 인사는 해도 돼?"
서윤재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떨렸고, 입가의 온화함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안 돼."
짧고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 단호함 안에 얼마나 큰 불안이 숨어 있는지, 도현은 알 것 같았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물을 것도, 따질 것도 없었다. 이 자리에서 더 말을 섞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알겠어."
그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등 뒤로 서윤재의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시선 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안도. 그리고 그 안도 뒤에 숨은 작은 불안.
숲을 벗어나는 동안 도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발끝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오랫동안 걸어온 길이 갑자기 끊긴 기분이었다.
캠프로 돌아온 도현을 본 박지호와 정민우는 표정만 보고도 짐작했다.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다가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가라고 했지."
박지호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에 놀라움은 없었다.
"셋 다래."
"셋 다?"
정민우가 짐을 싸던 손을 멈췄다. 접고 있던 옷가지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우리까지?"
"파티에 남자는 서윤재 하나면 충분하다더라."
박지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짧게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웃음소리에 힘이 없었다.
"차라리 편하겠다."
"편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제 지쳤어. 매번 묵린 뒤에서 숨만 쉬는 것 같았거든. 우리가 뭘 한 건지도 모르겠고."
박지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래 써왔지만 실전에서 제대로 휘두른 기억이 몇 번이나 있는지 세어보다가 그만두었다.
정민우가 짐을 챙기며 낮게 웅얼거렸다.
"난 좀 다르지만... 뭐, 상단 쪽에 아는 사람도 있고. 여기서 나가면 오히려 자유로워질 것 같기도 해."
"진심이야?"
"솔직히 말해서 여기 있는 동안 한 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었어.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 매일 했거든."
도현은 두 사람의 짐을 챙기는 손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이 순간, 세 사람의 표정에는 슬픔보다 안도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박지호가 도현을 바라보았다.
"넌 어떻게 할 거야?"
"모험가로 다시 시작해야지."
"다시?"
박지호의 눈이 커졌다.
"랭크가 다 초기화될 텐데."
"알아."
"G랭크부터 시작해야 할 거야. 지금까지 쌓아온 게 다 없어지는 거라고."
"알아."
"묵린 없이 혼자?"
도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짐을 정리하던 손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캠프 밖, 나무들 사이 어딘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무언가 낮게 울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혼자 해봐야지."
박지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민우도 짐을 싸던 손을 멈췄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정민우가 조용히 웃었다.
"모험가 다시 시작한다는 거,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근데... 왜 하필 지금이야?"
도현은 짐을 어깨에 걸쳤다. 어깨끈이 살에 닿는 감촉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 할 것 같아서."
그 말에 박지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손을 뻗어 도현의 어깨를 짧게 두드렸다. 손바닥의 온기가 잠시 어깨에 남았다.
"조심해."
"고마워."
"연락은 하고."
"할게."
짐을 다 챙긴 세 사람은 함께 캠프를 나섰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캠프의 천막들, 오랫동안 함께 지나온 자리들이 등 뒤로 조금씩 멀어졌다. 다만 도현만이 아주 짧게, 딱 한 번, 숲 너머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서 낮고 무거운 진동이 느껴진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땅 밑에서 올라오는 울림 같기도 했고, 귓속에서만 들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
마을 초입, 세 사람은 갈림길에서 걸음을 멈췄다. 흙길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오래된 표지판이 비스듬히 서 있었다.
"난 이쪽이야."
박지호가 왼쪽 길을 가리켰다.
"조용한 마을에 집을 하나 봐둔 게 있어. 이제 그거 살까 해. 마당도 있고, 뒤에는 작은 밭도 있더라고."
"잘 됐네."
"넌?"
"난 길드 본부."
정민우가 오른쪽을 가리켰다.
"상단 쪽 사람들 좀 만나야 해서. 예전에 몇 번 도움을 준 적이 있는데, 이제 갚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세 사람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얼굴들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부터, 함께 이름 없는 던전을 헤매던 시절부터. 밤새 모닥불 앞에서 서로의 등을 맞대고 잠들던 밤들이 있었다. 그 모든 기억이 이 짧은 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그럼."
도현이 먼저 등을 돌렸다.
"어디로 갈 건데?"
박지호의 물음에 도현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G랭크 길드 지부."
그는 짧게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흙길이 낯설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A랭크 이상의 길만 걸어왔던 발에게는, 이 낮은 등급의 흙길조차 어색했다.
등 뒤에서 정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혼자 할 수 있겠어?"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걸음의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조금씩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두려움인지 기대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마을의 지붕들이 붉게 물들어갔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하나둘 올라왔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그 소리를 지나쳐 계속 걸었다.
길드 지부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예전에 몇 번 지나쳤던 적이 있는 건물이었다. 그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낡은 건물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그 문을 직접 두드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 게 묘하게 실감 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는 처음으로 G랭크 길드 지부의 문을 두드렸다.
낡은 나무문이었다. 오랫동안 손이 닿아 반질반질해진 표면이었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문을 미는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 종이 뒤적이는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소리.
도현은 숨을 한 번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