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이호는 술기운을 잔뜩 풍기며 별채 마당에 들이닥쳤다. 해가 중천에도 못 미친 시각인데 벌써 얼굴이 시뻘겋게 익어 있었다. 어젯밤부터 마셨는지 걸음마저 비틀거렸는데, 그 와중에도 손에는 목검(木劍) 한 자루를 꼭 쥐고 있었다.
"이 폐인 새끼, 오늘은 아예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주마."
목소리에 술 냄새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등이 벽에 닿았다. '도망갈 곳도 없네, 젠장.'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손끝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제까지 두들겨 맞은 자리가 아직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오늘 또 이 짓이라니. '조현성, 이호, 이 집구석 인간들은 다 똑같구나.' 원망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소리 내어 뱉을 힘도 없었다.
빠득
첫 매질이 어깨를 때렸다. 뼈가 울리는 통증이었다. 시야가 잠깐 하얗게 지워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소리라도 내면 이 새끼가 더 좋아할 게 뻔했다.
"어디 한번 울어봐라, 그 잘난 천재가 어디까지 참는지 보자."
이호가 낄낄대며 두 번째 매질을 준비했다. 그의 눈빛에는 순수한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즐겁냐, 개새끼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엔 어디가 부러질까, 팔일까 다리일까,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는데,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요동쳤다.
그것은 혈혼곡에서 삼켰던 붉은 구슬의 잔재였다. 몇 달 동안 죽은 듯 잠들어 있던 그 기운이, 죽음보다 더한 모욕 앞에서 처음으로 반응했다. '뭐, 뭐야 이거...' 단전이 텅 비어 있다고 믿었던 그 자리에서, 낯선 열기가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귓속에서는 이명 같은 소리가 웅웅 울렸다. 몸 안의 무언가가 통째로 뒤집히는 듯한 감각이었다.
펑
이호의 목검이 두 번째로 내려오던 순간, 내 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틀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손끝에 닿은 힘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었다. '이게... 내 힘이 맞나?' 의심할 틈도 없이, 나는 그 힘을 그대로 이호의 팔뚝에 실었다.
으드득
이호의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악!"
그는 부러진 팔을 움켜쥐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목검이 힘없이 흙바닥에 굴렀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손등을 따라 붉은 혈맥(血脈)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었던 짐승이 처음으로 눈을 뜬 것 같은 감각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미약한 열기가 새어나왔다.
머릿속으로 낯선 구결(口訣)이 흘러들어왔다. 천하용제결(天下龍帝訣). 처음 보는 문구인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몸이 저절로 그 흐름을 따라갔다. 글자 하나하나가 눈앞에 새겨지듯 선명했고,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아까의 그 뜨거운 기운이 몸속 어딘가로 착착 정렬되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면 살 수 있겠다.' 나는 실소를 흘렸다. 웃음이 나오는 게 이상했지만,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마당 구석에서 연아가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항상 웃는 얼굴이던 그 아이가, 지금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굳어버린 표정이었다.
"오라버니...?"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녀를 향해 웃었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는 웃음이었다. 며칠 만에, 아니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이제부터 얘기가 좀 달라질 것 같다."
바닥에서 팔을 부여잡고 신음하던 이호가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얼굴은 이미 술기운이 다 가시고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너, 너 이 새끼, 무슨 사술(邪術)을 쓴 거야!"
목소리에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그 여유롭던 놈이 이제는 바닥에 기어서라도 도망치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걸음마다 손등의 혈맥이 조금씩 빛을 더했다.
그 순간, 마당 밖에서 이 소란을 듣고 몰려나온 하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그리고 조금은 두려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헉 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뒷걸음질까지 쳤다. 몇 달 동안 저 폐인 새끼, 저 병신이라 불리던 놈이 지금 이호의 팔을 맨손으로 부러뜨린 걸 자기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생각했다. '조현성, 너도 곧 이런 얼굴을 하게 될 거다.' 손등의 혈맥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밝게 빛나더니,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 열기는 사라지지 않고 단전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웅크렸다. 다음을 기다리는 짐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