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려졌는데 절대고수라니

1화

절벽 끝, 발밑은 천 길 낭떠러지였고 등 뒤는 스물을 헤아리는 검객(劍客)들이었다. 나는 검을 늘어뜨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발끝에서 부서지는 돌조각이 천 길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아득한 높이였다. '아, 이거 진짜 죽었네...'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온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원래 나는 그런 놈이었다. 죽을 판에도 헛소리를 하는. 선두에 선 자가 검을 겨눈 채 말했다. "천하혈주(天下血珠)의 위치만 말하면 살려주지." 목소리는 점잖았다. 마치 차 한 잔 나누며 안부를 묻는 투였다. 나는 피가 배어 나오는 입가를 닦으며 그를 노려봤다. "그걸 왜 니들한테 말해야 하는데." 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죽고 싶은 모양이군." '이 씹쌔끼,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잖아... 살려준다는 말은 그냥 입버릇이지.' 나는 다리에 남은 마지막 진기(眞氣)를 끌어모았다.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진기랄 게 남아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러운 상태였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었다. 챙 스릉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세 번째 놈의 검을 흘려내고 네 번째 놈의 검을 손등으로 쳐냈으나, 다섯 번째 검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뜨거운 통증이 아니라 이상하게 서늘한 감각이 먼저 왔다. '아, 이건 좀 깊이 들어갔네.' 나는 그 와중에도 상처의 깊이를 냉정하게 가늠했다. 몇 년을 그렇게 살았더니 이제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계산이 먼저 서는 몸이 되어 있었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절벽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걸 보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거 다 떨어지면 나도 같이 떨어지는 건가.'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검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나는 몸을 뒤틀어 하나를 피했지만 다른 하나는 어깨를 그었다. 손끝이 저려오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검을 제대로 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놈들도 그걸 아는지, 서두르지 않고 반원을 그리며 천천히 좁혀왔다.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는 게 익숙한 놈들처럼. 무릎이 꺾였다. 시야가 흐려지는 그 짧은 틈에, 웃기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현성(曹賢成). 형처럼 따랐던 그 낯짝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너 때문이야, 씨발...' 나는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게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혈지시련(血地試鍊)이 있던 그날부터. 그날, 그 웃는 낯짝만 보지 않았어도 나는 지금 이 절벽 위에 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의식이 아득해지는 순간,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그날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 천검문(天劍門) 외문 제자들 사이에서 나 이장혁(李長赫)의 이름은 남달랐다. 입문 삼 년 만에 내문 수료자와 견줄 만하다는 평이 돌았고, 그 소문의 절반은 사실 조현성 형님 덕이었다. 그는 내게 검을 가르쳐준 사람이었고, 동시에 나보다 반 걸음 앞선 천재였다. 훈련장에서 그와 마주 서면 언제나 검 끝이 먼저 웃는 것 같았다. 여유가 있었다는 뜻이다. "장혁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훈련장에서 그가 검을 거두며 웃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 모습이, 그때는 그냥 멋있어 보였다. "형님은 항상 저보다 먼저 지치시네요." 내가 이죽거리면 그는 이마를 툭 쳤다. "이 새끼가, 형 놀리는 실력만 늘었냐." 옆에서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이 낄낄거렸고, 나도 덩달아 웃었다. 그때 나는 그게 진짜 우정이라고 믿었다. 그때는 그게 진심인 줄 알았다. 씨발, 얼마나 순진했던 건지. 혈지시련이 열린다는 소식이 돌던 날, 문내는 온통 그 얘기로 들끓었다. 삼 년마다 열리는 시련이라, 살아 돌아오면 내문 입성이 보장된다는 말에 다들 눈이 뒤집혀 있었다. 조현성이 먼저 내게 다가와 팔을 두르며 말했다. "이번엔 나랑 같은 조로 가자. 혈혼곡(血魂谷) 인근이라던데, 위험한 데니까 서로 지켜줘야지."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형님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그때 내 머릿속엔 딱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혹시 못 돌아올까 봐 유품처럼 챙겨두었던 낡은 검집까지 다시 방에 처박아 넣었다. 그와 함께라면 죽을 일은 없을 거라고,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착각이었는지는,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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