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혈혼곡(血魂谷) 앞에 서면 등줄기부터 서늘해진다는 말을 선배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골짜기 안쪽에서 스며나오는 기운이 사람의 진기를 통째로 빨아들인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반신반의했었다. '설마 소문만큼 심하려고.'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참으로 세상을 몰랐다.
절벽길로 들어서기 전, 조현성은 유난히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장혁아, 오늘 저녁엔 뭐 먹을까" 하고 실없는 소리부터 늘어놓았을 사람인데, 그날은 앞장서 걷는 뒷모습만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의 등을 보며 괜한 생각을 했다. '형님이 요즘 문파 일로 스트레스가 심한가 보네.' 씨발, 스트레스는 얼어죽을. 그때 조금이라도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바람이 골짜기 안쪽에서부터 불어왔다. 비릿한 냄새, 쇠붙이 태우는 냄새 같기도 하고 오래된 피 냄새 같기도 한 그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 진짜 사람 사는 곳 냄새가 아니네.' 조현성과 나는 좁은 절벽길을 따라 골짜기 초입까지 나아갔다. 발밑으로 부서진 돌조각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장혁아."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낮고, 젖어 있고, 어딘가 갈라져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네, 형님."
"미안하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손바닥이 내 가슴을 밀었다.
쿵
몸이 뒤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조현성의 눈을 봤다. 그 눈에 담긴 게 슬픔인지 죄책감인지 아니면 그저 무표정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절벽 아래로 굴렀다. 손이 허공을 몇 번이나 움켜쥐었지만 잡을 것이 없었다. 절벽 벽면에 몸이 부딪히면서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이 스쳤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 형...' 떨어지는 그 몇 초가 영원처럼 길었다. 눈앞으로 스쳐가는 하늘 조각, 절벽의 이끼, 자신의 손, 그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늘어졌다가 다시 한꺼번에 압축됐다. 등이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과 동시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붉은 안개가 자욱한 골짜기 바닥에 누워 있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단전(丹田)에서부터 진기가 실처럼 풀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데, 정신은 이상하게도 또렷했다. 그 또렷함이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아, 씨발, 이거 진짜 죽는구나.'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억울함이 먼저 차올랐다. 형처럼 믿었던 사람에게 등을 밀려 떨어졌다는 사실이, 이 골짜기의 사기(邪氣)보다 더 아프게 몸을 파고들었다. 나는 몇 년간 그를 형이라 불렀다. 술도 나눠 마셨고, 밤새 무공 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손바닥 한 번에 그 모든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무너졌다.
며칠을 그렇게 굴렀는지 알 수 없었다. 붉은 안개는 시시각각 색을 바꿔가며 내 몸을 핥듯이 감쌌고, 나는 반쯤 정신을 잃은 채로 숨만 쉬고 있었다.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는 감각뿐이었다. 안개 속에서 붉은 광채가 어른거리는 걸 본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처음엔 헛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 빛은 점점 가까워졌고,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손을 뻗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던 순간까지는 기억이 났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그다음은 암전이었다.
구조대가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골짜기 초입에서 핏자국을 발견한 사냥꾼이 문파에 신고를 했고, 그 덕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골짜기의 사기가 내 단전을 완전히 부숴놓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한 폐인. 천검문 의원(醫員)의 그 한마디에, 나를 둘러싼 표정들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동정하던 눈빛은 금세 귀찮음으로, 걱정하던 얼굴은 이내 무관심으로 뒤바뀌었다. 사람이 그렇게 빨리 변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조현성은 그 자리에 없었다. 물론 있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그놈의 목을 물어뜯었을지도 모른다.
문파는 나를 오래 붙잡아두지 않았다. "쓸모없어진 제자를 계속 먹여줄 순 없지." 장로 하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걸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이미 마음 한켠이 텅 비어버린 뒤였으니까. 그날로 나는 짐짝처럼 마차에 실려 본가(本家)인 이씨 가문(李氏家門)으로 돌려보내졌다. 마부는 내 얼굴 한 번 쳐다보지 않았고, 짐칸에 실린 나는 삐걱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만 들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천장을 보며 웃었다. 웃지 않으면 울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웃음 끝에,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나는 뭘로 살아야 하나.' 답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