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저녁 무렵, 나는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소이와 마주쳤다.
두레박을 끌어올리는 손끝에 우물물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감겼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서 마당에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 그림자 끝에 소이가 서 있었다.
"오늘 산에 다녀오셨다고요." 소이가 물었다.
"그래."
"선생님이랑 둘이요?"
나는 그 질문의 뉘앙스를 그냥 넘겼다. 아이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억양이 없었지만, 어쩐지 그 문장 뒤에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캐물을 필요는 없었다.
"연구 때문이었다."
소이는 물동이를 받아 들며 대답했다. "그렇구나."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뭔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짚어내지 못했다. 아이는 물동이를 안고 부엌 쪽으로 걸어갔고,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남은 물을 마저 길었다.
'요즘 소이가 뭘 좀 눈치채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이 집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고, 아이는 그 적은 일들 중에서도 유난히 사소한 변화를 잘 잡아냈다. 나는 두레박을 내려놓고 별생각 없이 서재로 향했다.
그날 밤, 나는 서재에서 밀린 연구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낮에 산에서 채집한 정령석 표본들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는데, 하나하나 상태를 기록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촛불이 반쯤 타들어갔을 즈음, 밖에서 작은 소리를 들었다.
발소리였다. 마당 쪽으로 나가는.
처음엔 소이인가 싶었다. 밤늦게 화장실이라도 가는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발소리가 이상하게 느렸다.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피해 가는 듯한, 혹은 무언가에 이끌리는 듯한 걸음이었다.
나는 붓을 내려놓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서하은이 맨발로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밤바람이 제법 서늘했는데도 그녀는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흰 잠옷 자락이 다리에 감기고 풀렸다. 그녀는 손에 그 정령석 병을 쥐고 있었고, 입으로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거리가 있어 말소리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같은 문장을 반복하는 듯한 리듬이었다. 마치 기도문을 외듯, 혹은 저주를 풀듯.
'뭘 하는 거지.'
병 안의 정령석은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빛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언뜻 보면 사죄하는 자세 같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마당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서는 발소리조차 조심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중얼거림이 조금씩 들렸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병을 쥔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그 떨림이 병 안의 정령석에 옮겨져 작은 빛의 흔들림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뭔가 잘못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하은."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든 것처럼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막 올라온 사람처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는 게 보였다.
"선생님? 언제부터 거기…"
"밖에서 소리가 나서 나왔다. 뭘 하고 있었느냐."
그녀는 병을 뒤로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급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아, 그냥… 정령석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어요. 밤에 확인해야 정확한 데이터가 나와서요."
설명치고는 어설픈 설명이었다. 애초에 정령석 상태를 밤에 확인해야 한다는 이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설명을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손이, 아까 산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봤다.
"손이 왜 그러느냐."
"…모르겠어요. 요즘 계속 이래요."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스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드러내지 않을 감정이었다.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
"괜찮아요. 선생님 곁에 있으면 나을 거예요."
그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마치 그녀가 스스로도 믿지 않는 말을 억지로 뱉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 그녀를 밀어붙이면 오히려 더 안으로 숨어버릴 것 같았다.
"들어가자. 밤바람이 차다."
나는 그녀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다시 서재로 돌아왔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정리하던 자료는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그저 촛불을 바라보며 아까 본 광경을 되짚었다.
'정령을 소멸시킨 죄책감이 칠 년째 저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건 단순한 트라우마가 아니었다. 뭔가 더 깊은 곳에서 곪고 있는 문제였다. 죄책감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 것이 보통인데, 그녀의 경우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지고 있는 듯했다.
'칠 년이면 무뎌질 시간이다. 그런데 왜 지금 와서 더 심해지는 거지.'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방아쇠가, 어쩌면 내가 오늘 건넨 위로의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산에서 별생각 없이 던진 그 한마디가,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흔들어 깨운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속이 편치 않았다. 나는 촛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지만, 천장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음 날 아침, 부엌으로 나가던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소이와 마주쳤다. 평소라면 벌써 부엌 안에서 아침 준비를 돕고 있을 시간인데, 아이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스승님, 어젯밤에 마당에서 무슨 소리 들었어요."
나는 순간 멈춰 섰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 같았다.
"…들었니?"
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여전히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보통의 열두 살짜리 아이라면 무섭다거나 궁금하다는 감정을 얼굴에 드러낼 텐데, 소이의 얼굴은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것처럼 평온했다.
"저 선생님,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그 말을 하는 아이의 눈이, 처음으로 서늘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