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이후로 서연의 밤은 늘 같은 장면으로 끝났다.
같은 예지몽이 벌써 다섯 번째 반복되고 있었다. 학원이 무너지고, 강씨 공작가의 저택이 불타고, 그 잔해 속에서 하은이 서연을 안고 웃는 장면이었다.
처음 꿈을 꿨을 때는 그저 악몽이라 여겼다. 두 번째 꿈에서는 우연이라 생각했다. 세 번째부터는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네 번째에서는 잠들기가 무서워졌다. 그리고 다섯 번째 밤, 서연은 더 이상 이것을 우연이라 부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제 아무도 영애님을 뺏어갈 수 없어요." 꿈속의 하은은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슬픔도, 광기도 아닌, 그저 순수한 만족감이 섞여 있었다.
불타는 저택을 등지고 웃는 얼굴이 어쩜 그리도 해사한지. 서연은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서연은 그 만족감이 가장 무서웠다. 광기라면 어떻게든 설명이 될 텐데, 만족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은이 정말로 원하는 결말이라는 뜻이었으니까.
'다섯 번째면 확정이다.' 서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러 있었고, 손바닥은 이불을 움켜쥔 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첫 번째 마수 사건 때도 세 번이면 확정이라고 판단해서 움직였다. 그때는 세 번의 반복만으로도 온몸이 떨렸었다. 이번엔 다섯 번이었다. 다섯 번이나 같은 결말을 봤다는 건, 이제 망설일 여유조차 사치라는 뜻이었다. 더는 관망할 시간이 없었다.
서연은 창밖을 내다봤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새들도 잠들어 있을 시각에, 서연의 머릿속만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최덕수." 서연이 새벽부터 가령을 불렀다. 문을 두드리는 손끝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최덕수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옷매무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문을 열었으니, 그 몰골이 꽤나 우스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최덕수가 하품을 참으며 물었다.
"공작가 안에, 아무도 모르는 공간이 있나?"
그 질문에 최덕수의 하품이 순식간에 멎었다.
"성녀를 격리할 곳이 필요해."
최덕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격리라니요, 감히 성녀님을……" 그는 잠이 덜 깬 사람답지 않게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격리가 아니면, 이대로 있다가 저택이 재로 변하는 걸 지켜볼 거야?" 서연이 최덕수의 말을 끊었다.
최덕수는 입을 다물었다. 최근 며칠 사이 하은의 눈빛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그도 모르지 않았다. 식사 자리에서 서연만을 좇는 시선, 서연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살짝 굳는 입매, 그런 것들을 최덕수라고 못 봤을 리 없었다.
"……별채가 하나 있습니다." 최덕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선대 공작님 시절 봉인해둔 곳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드나들지 않습니다."
"봉인이라니, 뭘 봉인했는데?"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그곳에 발을 들이면 안 된다는 유언만 전해 들었을 뿐입니다."
"유언만 전해 들었는데 지금까지 지켜온 거야?" 서연이 되물었다.
"공작가의 명령이니까요." 최덕수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 담백한 대답이 오히려 서연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연은 잠시 생각했다. 위험한 공간일지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봉인된, 유언으로만 전해지는 공간이라니. 상식적으로 좋은 곳일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위험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거기로 가지."
최덕수가 뭔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서연의 표정을 보고는 그냥 다물었다. 저 표정을 봤을 때는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그도 몇 번의 경험으로 배운 뒤였다.
***
별채는 저택 뒤편, 정원수 사이에 숨겨진 낡은 건물이었다.
담쟁이가 벽 전체를 덮고 있었고, 문에는 낯선 문양이 새겨진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최덕수가 오래된 열쇠 꾸러미를 뒤지는 동안, 서연은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그 문양을 살펴봤다.
문양은 원형이었고, 그 안에 두 개의 초승달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흔한 가문의 문장도 아니었고, 신전에서 쓰는 성문도 아니었다.
'이거……' 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작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문양이었다.
"열렸습니다." 최덕수가 낡은 자물쇠를 돌리며 말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공간 특유의, 먼지와 습기가 섞인 냄새가 확 밀려나왔다.
최덕수가 콜록거리며 코를 막았고, 서연도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숨을 참았다.
안은 오래 방치된 서재였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책장들, 깨진 유리창, 그리고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상자 하나.
서연은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닥에 깔린 먼지가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눌렸다. 이곳에 마지막으로 발을 들인 게 몇 년 전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건 하은을 가둘 만한 곳이 아닌데." 서연이 방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문도 하나뿐이고, 창문도 성인 하나 겨우 지나갈 크기였다. 격리라기엔 허술했다. "오히려……"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서연의 시선이 벽에 걸린 낡은 초상화에 멈췄다.
초상화 속 여자는 하은과 똑같은 백발이었다. 다만 눈동자 색이 달랐다. 한쪽은 금빛, 다른 한쪽은 칠흑처럼 검었다.
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리가 지팡이에 힘없이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그것조차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최덕수." 서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 그림,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알아?"
최덕수가 초상화 앞으로 다가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이건……" 그가 말을 멈췄다.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입술이 두어 번 달싹였지만,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백 년도 더 된 그림입니다."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성녀님 얼굴과 똑같습니다."
서연은 순간 숨을 삼켰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것이 흘러내렸다.
백 년 전의 그림. 하은과 똑같은 백발. 그리고 서로 다른 색의 두 눈동자. 이건 우연이라 부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낡은 상자 뚜껑 위, 먼지 사이로 희미하게 새겨진 문장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서연은 무릎을 굽혀 상자 앞에 앉았고, 손끝으로 먼지를 조심스레 쓸어냈다.
먼지 아래에서, 오래된 글자가 하나씩 드러났다.
'빛과 어둠을 함께 품은 자, 세상을 삼키거나 세상을 구하리라.'
서연은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등 뒤에 서 있는 최덕수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