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가는 오른발 하나였다

1화

강씨 공작가의 본채, 서연의 침실에는 촛불 하나가 밤새 꺼지지 않았다. 그 불빛 아래, 침대 곁 의자에 앉은 여자가 있었다. 백하은이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모으고, 잠든 서연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지나치게 다정했다. 다정함이 지나치면 그것도 병이 된다는 걸, 이 저택의 누구도 아직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도 여기 있네.' 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자는 척을 한 지 벌써 두 시간째였다. 숨소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도 이제는 요령이 붙어서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하은이 그 요령마저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안 자는 거 알아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결국 눈을 떴다. 촛불에 비친 하은의 얼굴은 여전히 성녀다웠다. 순백의 머리카락, 흠결 없는 피부, 그리고 그 아래 감춰진 무언가. "……언제부터 와 있었어?" 서연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목소리에 짜증을 섞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자정 조금 지나서요." 하은이 대답하며 웃었다. 그 웃음이 문제였다. 지나치게 밝고, 지나치게 투명해서, 마치 유리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였고. "방문은 왜 걸어놓고 들어왔지?" 서연이 눈썹을 좁혔다. "영애님이 다치실까 봐요." 대답은 단순했다. 지나치게 단순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 이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지 벌써 석 달이었다. 소문으로만 놓고 보면 강서연은 악역이었다. 평민 출신 성녀를 괴롭히고, 왕자의 총애를 독차지하려 들다가 결국 파멸하는 여자. 학원 안에서 아이들이 저마다 떠들던 이야기였고, 서연 본인도 한때는 그 소문의 결말이 진짜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 이 방 안 풍경은, 그 소문과는 정반대였다. 악역이라던 영애는 침대에 갇혀 있고, 피해자여야 할 성녀는 밤마다 그 곁을 지키며 촛불을 켜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어.' 서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몇 번째 하는 생각인지 셀 수도 없었다.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손끝이 서늘했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몸짓이었지만, 서연은 그 손이 지나가는 순간 등줄기가 굳는 걸 느꼈다. "열은 없네요." 하은이 안심한 듯 웃었다. "다행이에요. 영애님이 아프면 저도 아파요." 그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능력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 저택에 서연 한 사람뿐이었다. *** 서연이 처음 '전생'이라는 걸 자각한 건 여덟 살, 아니 정확히는 마차 바퀴가 오른발을 짓누르던 그 순간이었다. 영지를 오가던 마차가 산길에서 굴렀고, 서연은 뒤집힌 차체 아래 다리가 끼인 채 세 시간을 버텼다. 의식이 흐려지던 그때,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낯선 언어, 낯선 도시, 그리고 낯선 이야기 하나. 그 이야기 속에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여자가 있었다. '강서연.' 이름까지 같았다. 악역 영애. 파멸이 예정된 조연. 의사는 오른발을 살리지 못했다. 이후 서연의 걸음걸이는 조금씩 절뚝였고, 궁정 마법사들은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미약한 마력의 자취조차 더 이상 찾아내지 못했다. 다리와 마력을 함께 잃은 대가로, 서연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어렴풋이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가가 그것뿐이었다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랬는데. *** "오늘은 좀 늦게 나가시네요." 하은이 서연의 지팡이를 챙겨 건네며 물었다. 목소리에 서운함이 살짝 얹혀 있었다. "수업이 있으니까." 서연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절뚝이는 걸음이었지만, 그 걸음에는 이제 익숙한 무게감이 있었다. "제가 데려다드릴까요?" "됐어. 학원 안까지 성녀가 시종처럼 붙어 다니면 그것도 이상한 소리 나와." 하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그 침묵이 순종의 침묵이 아니라는 걸,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알겠어요." 대답은 순순했다. 지나치게 순순해서, 서연은 문을 나서면서도 등이 서늘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서연의 머릿속은 다른 계산으로 옮겨 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지.' 하은의 애정이라는 게, 처음에는 감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감사가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어떤 형태로 바뀌고 있는지, 서연은 아직 정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그 대가가 오른발과 마력만이 아니라는 것. 앞으로 무엇을 더 지불해야 할지, 서연은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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