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회상은 마차 사고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른발을 잃고 마력을 잃은 대신, 서연은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이야기의 얼개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예지몽처럼 밤마다 조각조각 찾아왔다. 처음엔 그저 뒤숭숭한 악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같은 장면이 사흘 연속으로 반복되자, 서연은 그것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떤 밤은 선명했고, 어떤 밤은 흐릿했다. 어떤 날은 대사까지 또렷하게 들렸고, 어떤 날은 그림자만 스쳐 지나가듯 애매했다. 하지만 결말은 늘 같았다.
'평민 출신 성녀를 시기하다 파멸하는 악역 영애.'
서연 자신이 바로 그 악역 영애였다.
그 결말을 처음 확인한 건 열다섯 살, 학원 입학 첫 학기였다. 백하은이라는 이름의 특대생이 입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서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입학식 연단에 오른 얼굴을 보는 순간, 몇 번이나 꿈속에서 마주쳤던 그 얼굴이 그대로 겹쳐졌다.
'저 사람이구나.' 소설 속에서 자신을 단두대로 보내던 그 얼굴이었다.
서연이 살아남는 법은 하나뿐이었다. 원작의 흐름을 뒤집는 것. 성녀를 괴롭히는 대신, 성녀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안기는 것. 미워할 이유를 만들지 않으면, 미움을 살 일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계산은 간단했지만 실행은 위험했다. 성녀의 인생에 끼어든다는 것 자체가, 원작이 짜놓은 판을 흔드는 일이었으니까.
***
기회는 입학한 지 반년 만에 왔다.
학원 뒤편 숲에서 실습 중이던 하은이 봉인된 마수 우리 근처에서 사고를 당한다는 사실을, 서연은 예지몽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마수의 이빨이 하은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그 장면을 서연은 세 번이나 꿈에서 봤다. 처음엔 우연이라 여겼고, 두 번째엔 불안했고, 세 번째엔 확신했다.
'세 번이나 반복되면 그건 그냥 확정이라고 봐야지.' 서연은 그렇게 판단했다.
문제는 확정된 미래를 알면서도, 그것을 막아야 할 이유가 오직 자기 목숨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은을 구해서 원작을 흔들지 못하면, 결국 자기가 단두대에 오른다. 그러니 이건 선의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서연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그렇게 되새겼다.
그날 서연은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는 몸으로 숲까지 걸어갔다. 흙길은 절뚝거리는 발에 유독 고약했고, 나뭇가지 하나가 지팡이 끝에 걸려 넘어질 뻔한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서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수 우리의 잠금장치가 풀리기 십 분 전이었다. 서연은 아무 설명도 없이 하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하은이 당황해서 물었다. 눈이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닥치고 따라와." 서연이 짧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말투는 스스로도 부끄러운 종류였다. 협박도 아니고 부탁도 아닌, 그저 다급함이 날 것 그대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은은 저항하지 않았다. 손목을 잡힌 채로, 얼떨결에 서연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숲 밖으로 벗어난 순간, 등 뒤에서 우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굉음이었다. 마수 한 마리가 뛰쳐나와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헤집었다. 발톱이 땅을 긁는 소리가 한참이나 이어졌다.
하은은 그 자리에 서서,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목소리가 떨렸다.
"몰라도 돼." 서연이 등을 돌리며 답했다. 그때는 그것으로 끝일 줄 알았다. 절뚝이는 걸음으로 다시 숲을 벗어나면서, 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하면 됐다. 죽을 뻔한 걸 구했으니, 앙심 품을 이유는 하나 지웠겠지.'
***
하지만 그날 이후, 하은은 서연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은이 다음 날 학원 정원에서 그렇게 말했을 때, 서연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갚을 필요 없어. 그냥 앞으로 나한테 시비 걸지만 마." 서연 나름의 협상이었다. 원작의 흐름을 끊어놓는 최소한의 조건.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하은이 정색하며 되물었다. "목숨 값을 그렇게 싸게 치려고 하시면 제가 마음이 편하겠어요?"
"그럼 뭘 어쩌라는 건데." 서연은 진짜로 몰라서 물었다.
그런데 하은은 그 물음에 전혀 다르게 대답했다.
"평생 곁에 있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하은의 눈빛이, 그날은 그저 순수한 감사로만 보였다. 서연은 잠깐 멈칫했지만, 곧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 서연은 그렇게 넘겼다. 사춘기 소녀가 감격에 겨워 뱉는 과장된 말 정도로만 여겼다. 그 순간이 이후 벌어질 모든 고생의 시발점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
부채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형태를 바꿨다.
처음엔 감사의 인사였고, 다음엔 선물이었다. 손수 말린 꽃다발이나 정성스레 싼 과자 꾸러미 같은 것들이 서연의 방문 앞에 놓여 있었다. 그다음엔 매일같이 서연의 방문 앞에 나타나는 걸음이었다. 학원 안에서도 하은은 서연이 가는 곳마다 근처에 있었다. 식당에서도, 도서관에서도, 심지어 마차를 대는 정문 앞에서도.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정확한 우연이었다.
한번은 서연이 강의실을 나서다 뒤를 돌아본 순간, 하은이 기둥 뒤에서 재빨리 숨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거기서 뭐 해?" 서연이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은이 얼굴을 붉히며 나왔다. 그 붉어진 얼굴이 그저 부끄러움 때문이라 여기기엔, 서연도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다.
최덕수는 그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 중 하나였다.
"아가씨." 공작가의 가령인 최덕수가 어느 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성녀님께서 요즘 지나치게 아가씨께 신경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만."
"알아." 서연이 짧게 답했다.
"괜찮으신 겁니까." 최덕수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우려가 섞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녀의 존재감이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학원 내에서, 그 성녀가 유독 한 사람에게만 집착하듯 붙어 있는 모습은 결코 좋은 신호로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감사 표현이 좀 과한 거야." 서연이 대충 둘러댔다.
"과해도 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제는 성녀님께서 아가씨 수업 시간표까지 외우고 계시더군요."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하기엔, 그날 밤 꾼 예지몽 하나가 아직도 머릿속에 걸려 있었다.
그 꿈속에서 하은은 웃고 있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누구라도 마음을 놓을 법한 그런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 아래, 학원 전체가 불타고 있었다. 불길이 창문을 삼키고, 학생들의 비명이 뒤섞이는 그 광경 속에서도 하은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서연을 향해서만.
서연은 그 꿈을 최덕수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이후로 밤마다 같은 자리에서 눈을 뜨는 버릇이 생겼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