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며칠이 지나자 저택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담장은 새로 손질되었고, 무너졌던 기와도 하나하나 새로 얹혔다. 대책실 요원들의 발걸음도 예전처럼 느긋해졌다.
서리는 다시 도윤의 계란말이를 앞에 두고 젓가락을 놀리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노랗게 잘 됐네." 서리가 짧게 평했다.
"소금을 조금 줄였습니다." 도윤이 답했다. "지난번보다 싱거울 겁니다."
서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 침묵이 만족의 표시라는 걸, 도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도윤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최고봉의 말이 남아 있었다.
'소재 음식.' 최고봉은 그렇게 말했었다. 재료 자체의 격이 다른 음식. 사람이 아니라 재료가 요리를 만드는 세계.
그 표현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 계란을 젓는 손목의 움직임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나는 아직 격식 있는 요리를 배운 적이 없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부엌에서 익힌 것은 손맛이었지, 격식 있게 요리를 배우는 법은 아니었다.
서리는 그런 도윤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서리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윤이 웃으며 답했다.
서리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계란말이 한 조각을 더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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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도윤은 채소를 사러 저택 근처 시장에 나섰다. 서리는 낮잠을 자고 있었고, 요원 하나가 잠깐씩 곁을 지키는 시간이었다. 저택 안의 공기가 가장 느슨해지는 시각이었다.
시장은 여느 때처럼 소란스러웠다. 좌판마다 채소와 생선이 쌓여 있었고, 흥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오늘도 계란말이 하실 거예요?" 채소 가게 딸 소은이 밝게 물었다.
"거의 매일 그렇습니다." 도윤이 웃으며 답했다.
"저도 배워보고 싶어요. 도윤 님 요리, 시장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소은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소은은 채소 가게를 오래 다니며 도윤과 마주친 사이였다. 그녀는 도윤이 만드는 계란말이 이야기를 이웃들에게 몇 번이나 들었고, 언젠가 직접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시장에서 파는 채소 중 어떤 걸 골라야 좋은지, 도윤이 늘 어떤 것을 집어 가는지도 눈여겨봐 둔 터였다.
"이 파는 어제 들어온 거예요. 뿌리가 튼튼한 걸로만 골랐어요." 소은이 파 한 단을 내밀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도윤이 파를 받아 들며 뿌리를 살펴보았다. 확실히 성한 것들이었다.
"다음에 시간 나면 알려드릴게요." 도윤이 무심히 답했다.
"정말요? 그럼 이따 저녁에 가게 끝나고 잠깐 들를까요?" 소은이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단순한 요리 배움 이상의 기대가 섞여 있었다.
도윤은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그저 채소를 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괜찮으시면요." 도윤이 짧게 답했다.
소은은 그 대답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도윤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그럼 약속한 거예요." 소은이 웃으며 말했다.
도윤은 그제야 소매가 붙잡힌 것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장에서 흔히 있는 인사치레라 생각했다.
+++
같은 시각, 저택 창가에서 낮잠을 자던 서리가 눈을 떴다. 그녀는 도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런 감각은 언제나 정확했다. 마치 몸 어딘가에 도윤의 위치를 알려주는 실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해는 아직 중천에 걸려 있었지만, 도윤이 채소를 사러 나간 지 벌써 한 시진이 지났다는 걸 계산했다.
'채소 사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원의 눈을 피해 밖으로 나온 서리는, 시장 어귀에서 도윤과 소은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소은이 도윤의 소매를 살짝 붙잡고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표정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발밑, 땅바닥에서부터 미세한 진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수레 때문인가 싶을 정도로 작은 흔들림이었다.
서리는 소은의 손이 도윤의 소매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도윤이 그 손을 뿌리치지 않는 것도 보았다.
'저건.' 그녀의 속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 차가움 아래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천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늘 위로 검은 구름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방금까지 맑았던 하늘이었다. 구름은 마치 먹물을 풀어놓은 듯 빠르게 퍼져나갔다.
"바람이 왜 이러지." 시장 상인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좌판 위의 천막이 갑자기 세게 펄럭였다.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도윤도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자신의 뒤편에 서 있는 서리를 발견했다.
"서리." 도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윤과 소은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노기도, 슬픔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소은의 손끝에 오래 머물렀다.
쿠구구-
땅이 낮게 울렸다.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좌판이 흔들리고, 지붕 기와가 하나둘 떨어져 내렸다.
콰직-
근처 가게의 나무 기둥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 하나가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다.
"이게 무슨..." 소은이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녀는 도윤의 소매를 놓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질 뻔했다.
도윤은 순간 온몸이 서늘해졌다.
'설마.' 그는 그 짧은 생각과 동시에, 뛰기 시작했다.
서리를 향해 달려가는 그의 발밑에서도 땅이 흔들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면이 미세하게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택 방향에서 대책실 요원들이 뒤늦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장주님께 보고해!" 누군가 외쳤다. "천렬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외침에 시장 전체가 얼어붙었다. 상인들은 물건을 팽개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좌판이 넘어지며 채소와 과일이 바닥에 쏟아졌다.
도윤은 그 외침을 들으며, 서리의 표정을 다시 살폈다. 여전히 겉으로는 잠잠했다.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입술도 굳게 다물려 있었다. 그러나 그 잠잠함이야말로, 지금껏 그가 본 어떤 모습보다 위태로워 보였다.
'질투인가.' 그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 도윤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한을 느꼈다.
그가 서리 앞에 다다랐을 때, 서리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소은이 서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서리, 저는..." 도윤이 말을 꺼내려 했다.
"알아." 서리가 짧게 답했다. 목소리에는 아무런 기복이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도윤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늘은 이미 시장 전체를 덮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고, 땅의 흔들림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몇몇 가게의 지붕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도윤은 서리의 손을 잡을 수도, 그녀를 안심시킬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저 이 재앙이 어디까지 커질지, 그것만이 두려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