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저녁, 태호는 서재에서 서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재 안은 조용했다.
벽난로 속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탁, 하고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
그 외엔 정적이었다.
"촛불이 흔들렸다고?"
"네. 바람도 없었는데."
태호는 팔짱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저 멀리 영지의 낮은 지붕들이 보였다.
지붕마다 희미한 불빛이 하나둘 켜져 있었다.
평범한 밤이었다.
평범해야 할 밤이었다.
"측정관이 잘못 봤을 리는 없어. 최하위 판정은 확실해."
"저도 알아요. 그런데 유모가 본 것도, 제가 본 것도 분명해요."
태호는 오래 침묵했다.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몇 번 두드렸다.
그 소리가 서재 안에 낮게 울렸다.
"직접 봐야겠군."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한쪽이 살짝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섞인,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다음날 오후, 가족은 뒤뜰 정원에 모였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바람은 거의 없었다.
잔디 위엔 이슬이 아직 남아 있었다.
도현이 검을 손질하다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도윤이 좀 지켜보려는 것뿐이야."
서윤이 대답했다.
서은도 팔짱을 낀 채 옆에 서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냉소적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도윤을 훑고 지나갔다가, 다시 정원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마력 최하위인 애가 뭘 보여준다는 거예요."
"확인해보면 알겠지."
태호가 짧게 답했다.
도윤은 가족들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느끼며 조금 긴장했다.
어젯밤엔 자기도 모르게 힘이 발현됐지만, 지금은 다들 지켜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하려니 오히려 안 되는 느낌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정원 한가운데 작은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돌멩이 하나가 놓였다.
서윤이 준비한 것이었다.
회색빛의 평범한 돌.
표면엔 작은 흠집이 몇 개 있었고, 한쪽은 매끈하게 닳아 있었다.
"저 돌을 움직여볼 수 있겠니?"
도윤은 돌을 바라보았다.
집중했다.
눈썹을 찌푸리고, 어금니를 살짝 물었다.
움직여라. 움직여라.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은이 코웃음을 쳤다.
"거 봐요. 우연이었던 거예요."
"조금 더 기다려보자."
태호가 말했다.
도윤의 이마에 땀이 났다.
의식하면 안 되는 걸까.
어젯밤엔 그냥 무언가를 바라보고, 강하게 원했을 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전생의 습관을 떠올렸다.
어려운 문제를 풀 때, 답을 억지로 찾으려 하면 안 풀리던 것.
오히려 마음을 비웠을 때 실마리가 보이던 것.
시험지 앞에서 머리가 하얘질 때, 잠시 눈을 감고 숫자를 세던 습관.
셈이 아니라 리듬이었다.
하나, 둘, 셋.
마음이 가라앉으면 문제의 구조가 저절로 보였다.
그는 억지로 힘을 짜내려 하지 않고, 그저 돌멩이의 무게와 모양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돌의 표면, 그 안에 담긴 색깔, 그것이 굴러가는 모습.
차갑고 단단한 감촉.
손에 쥐었을 때의 무게감.
그 무게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지는 순간을 상상했다.
돌멩이가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한 뼘쯤 굴러갔다.
정원에 정적이 흘렀다.
서은의 눈이 커졌다.
도현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검을 손질하던 천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잔디 위로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줍지도 않았다.
태호가 앞으로 다가갔다.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위에 놓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평범한 돌이었다.
아무 장치도, 아무 표식도 없었다.
"바람 때문은 아니었겠지."
"바람은 없었어요."
서윤이 확인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태호의 손이 떨렸다.
그는 그 떨림을 감추려 손을 등 뒤로 돌렸다.
하지만 목소리마저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다시 해볼 수 있겠니?"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조금 더 자신 있었다.
방법을 알 것 같았다.
결국 힘을 쓰는 방법은 어려운 문제를 풀 때와 다르지 않았다.
욕심을 버리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돌멩이를 다시 탁자 위에 놓았다.
도윤은 이번엔 눈을 뜬 채로 돌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 돌이 원을 그리며 도는 모습을 그렸다.
돌이 회전하는 궤적을 하나의 선으로 그려보았다.
동그란 선.
끊어지지 않는 선.
돌이 천천히 돌아갔다.
한 바퀴, 그리고 반 바퀴 더.
정원의 모두가 숨을 멈췄다.
새소리조차 잠시 멀어진 듯했다.
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잔디 위에 낮은 소리를 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마력이 거의 없는데."
그녀의 목소리엔 놀람과 함께 경계가 섞여 있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마력이 없다는 건 아니에요. 최하위 등급이라는 거죠."
서윤이 조용히 정정했다.
"그거나 그거나…"
서은은 말을 멈췄다.
도윤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아이의 얼굴에서, 손끝으로, 다시 탁자 위의 돌로 옮겨갔다.
지금까지 그녀는 동생을 그저 마법과 인연이 없는 아이로 여겼다.
방에서 조용히 책만 읽는, 존재감 없는 막내.
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은 그 판단을 뒤흔들고 있었다.
"마력이 최하위인데 어떻게 사물을 이렇게 정밀하게 움직여?"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답을 알지 못했다.
도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저번에 나보고 검 자세 잡아달라고 했을 때도… 그냥 눈으로만 보고 따라 하던데. 그게 이거랑 관련이 있나?"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질문은 정원의 공기 속으로 그냥 흩어졌다.
태호는 도윤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을 맞췄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아버지의 눈에는 낯선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자랑스러움과 걱정이 뒤섞인, 복잡한 빛이었다.
"도윤아. 이걸 언제부터 할 수 있었니?"
도윤은 잠시 고민했다.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는 것도, 방금 즉석으로 방법을 터득했다는 것도.
그런 말을 하면 오히려 더 이상한 아이로 보일 것이었다.
"그냥… 되던데요."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엔 거짓이 없었다.
실제로 그는 그저 원하는 대로 되었을 뿐이었다.
태호는 도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손의 온도는 따뜻했다.
도윤은 그 온기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건… 가문에 알려야 할 일이다."
서은이 팔짱을 꼈다.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시선은 계속 도윤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의 눈빛엔 이제 경계뿐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계산.
혹은 저울질.
"측정 결과를 다시 받을 수도 없는데 이걸 알려서 뭘 어쩌자는 거예요."
"방법이 있을 거야."
태호의 목소리엔 오랜만에 힘이 서려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활력이 그 목소리 안에 다시 살아난 듯했다.
서윤은 도윤을 끌어안았다.
작은 몸을 품에 안은 채, 그녀는 눈물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의 머리에서 옅은 비누 냄새가 났다.
그 평범한 냄새가 지금은 이상하게도 뭉클했다.
"엄마…"
도윤이 작게 불렀다.
"괜찮아. 다 괜찮아."
서윤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 있었다.
서은은 그 광경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았다.
잔디 끝에 서서, 두 사람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복잡한 웃음이었다.
"다음엔 좀 더 어려운 걸 시켜보죠."
그녀가 말했다.
"뭘 시키려고?"
도현이 물었다.
서은은 대답하지 않고 정원을 벗어났다.
그녀의 걸음걸이엔 어떤 결심이 서려 있었다.
발걸음마다 일정한 속도.
망설임 없는 속도였다.
도현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검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제 손질할 마음은 없었다.
그는 도윤을 슬쩍 바라보았다.
동생이 뭔가 특별해졌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그날 밤, 서은의 방 창문 너머로 늦게까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서재에서 낡은 마법 이론서를 뒤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 안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사락. 사락.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방 안에 가득했다.
낡은 가죽 표지들.
색이 바랜 잉크 자국들.
찾고 있는 것은 하나였다.
마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도 정밀한 조종이 가능한 사례.
그녀는 손끝으로 책장을 훑으며 목차를 확인했다.
「등급별 마력 발현 양상」
「하위 등급 마력자의 한계」
「측정 오류 사례 연구」
하나씩 펼쳐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원하는 답은 없었다.
전부 예상 가능한 내용들이었다.
등급이 낮으면 발현도 약하다.
당연한 결론들뿐이었다.
책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었다.
서은은 책을 덮었다.
탁, 하는 소리가 서재 안에 낮게 울렸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작은 창문 하나,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 불빛.
그녀는 오랫동안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낮에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돌멩이가 흔들리던 순간.
그것이 원을 그리며 돌아가던 순간.
너무 정밀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마력이 최하위인데.'
그녀는 다시 한번 그 생각을 곱씹었다.
등급과 실력이 이렇게 어긋나는 경우를,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가문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어떤 기록에서도.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였다.
측정 자체가 틀렸거나.
아니면 도윤이 뭔가를 숨기고 있거나.
서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동생의 방 불빛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 불빛이 꺼질 때까지 창가에 서 있을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확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