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날 아침, 유모는 도윤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러 방에 들어왔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걸음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대야에 담긴 물의 온도를 손등으로 확인하고, 수건을 팔에 걸치고, 오늘 입힐 옷을 미리 골라 든 채였다.
평범한 아침이어야 했다.
문을 열었다.
방 안 풍경이 낯설었다.
책장에서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두꺼운 가죽 표지의 책이었다. 원래 서재에 있어야 할 책이었다.
도윤의 방에는 그림책 몇 권과 낡은 목마 인형뿐, 이런 두께의 책은 놓인 적이 없었다.
유모는 대야를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이게 왜 여기…"
바닥에는 다른 흔적이 없었다. 먼지도, 발자국도.
마치 책이 스스로 그 자리에 나타난 것처럼 놓여 있었다.
유모가 책을 집어 들었다.
가죽 표지는 손끝에 서늘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표지를 넘기려는 순간, 도윤이 손을 뻗었다.
"제가 볼게요."
다섯 살 아이의 말투로는 어색할 만큼 또렷한 발음이었다.
유모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웃으며 책을 건넸다.
"도윤 님이 벌써 글을 읽으세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을 펼쳤다.
그림이 많은 아동용 이야기책이었다.
마법사와 용, 그리고 잃어버린 왕관에 대한 이야기.
표지 그림 속 마법사는 지팡이를 든 채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용은 이빨을 드러내고 웅크려 있었다.
도윤은 첫 페이지를 눈으로 훑었다.
글자는 단순했다. 전생의 기억으로 치면 유치원 수준의 문장.
그런데도 뭔가 눈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왕관을 훔쳐 간 용이 산 정상의 동굴에 숨었다는 대목.
마법사가 그 동굴을 찾아가는 여정.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구조였다. 전생의 어떤 이야기와도 닮아 있었다. 다른 세계인데도, 이야기의 뼈대는 비슷했다.
도윤은 페이지를 넘겼다.
손가락으로 넘긴 것이 아니었다.
페이지가 스스로 넘어갔다.
바스락.
유모는 그 소리를 들었다.
눈이 커졌다.
"방금…"
도윤은 얼른 손을 뻗어 다음 페이지를 짚었다.
마치 자신이 넘긴 것처럼 보이려 했지만, 유모의 눈은 이미 정확히 보았다.
페이지가 손이 닿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는 것을.
유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다 곧 어떤 확신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손이 가슴 앞에서 저절로 모아졌다.
"세상에."
그녀는 무릎을 꿇고 도윤의 어깨를 잡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윤 님, 지금 그거… 다시 해보실 수 있으세요?"
도윤은 대답 대신 눈을 굴렸다.
솔직히 말하면 자신도 방법을 몰랐다.
어젯밤 나무 인형이 움직인 것도, 지금 책장이 넘어간 것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강하게 바라보고, 원했을 뿐이었다.
전생에서 그는 물리 법칙을 믿는 사람이었다.
손대지 않은 물건은 움직이지 않는다.
질량이 있는 것은 힘이 가해지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문다.
공학을 전공하며 배운 것들은 그 단순한 명제 위에 세워져 있었다.
힘과 반작용. 관성. 중력.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그 법칙이 다르게 작동하는 듯했다.
어제는 나무 인형의 팔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늘은 책장이 손끝보다 먼저 넘어갔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그가 강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때 일어났다는 것.
우연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건드린 것일까.
도윤은 다시 책을 바라보았다.
페이지를 넘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눈에 힘을 주고, 페이지의 가장자리를 노려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중이 부족했나.
아니면 우연이었나.
방금 전과 지금, 무엇이 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어젯밤에도 똑같은 의문이 있었다. 나무 인형이 움직인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도윤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스위치를 찾지 못한 채 벽을 더듬는 기분이었다.
유모는 도윤의 침묵을 겸손함으로 받아들였다.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그녀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으며 그녀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치맛자락이 발목에 스칠 정도로 빠른 걸음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력 최하위 판정을 받은 아이. 그런 아이가 손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였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서윤은 응접실에서 낡은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곳간의 밀이 예상보다 빨리 줄고 있었다.
장부를 넘기는 손끝에 먹 냄새가 묻어났다.
지난달 기록과 이번 달 기록을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차이는 분명했다. 도둑질인지, 계산 실수인지, 아니면 곳간 관리인의 게으름인지.
그녀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직접 확인해야 하는 게 이 집안의 현실이었다.
그때 유모가 뛰어들어왔다.
"마님, 마님. 도윤 님이…"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장부를 든 손이 그대로 멈췄다.
"도윤이 왜."
유모는 숨을 몰아쉬며 방금 본 것을 설명했다.
나무 인형, 그리고 책장.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빨라졌다. 손짓까지 섞어가며 페이지가 넘어간 순간을 재현하려 했다.
서윤의 표정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확실해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페이지가 손에 닿기도 전에 넘어갔어요."
유모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정말입니다, 마님. 제가 헛것을 본 게 아니에요."
서윤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마력 최하위 판정을 받은 아이가 물건을 움직였다는 이야기.
믿고 싶은 마음과 믿을 수 없는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도윤에게 뭔가 특별한 힘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알려진다면, 이 집안이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최하위 판정을 받은 아이가 갑자기 이상한 힘을 보인다는 소문.
좋은 쪽으로 해석될 리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아직은."
서윤이 말했다.
유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엔 이미 확신이 서려 있었다.
말은 하지 않겠다 했지만, 그 표정만으로도 이미 무언가를 믿고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서윤은 유모가 방을 나선 뒤에도 한참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부의 숫자는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밤, 서윤은 도윤의 방문 앞에 조용히 섰다.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복도의 촛불이 그녀의 등 뒤에서 흔들렸다.
그림자가 문틈을 따라 방 안으로 길게 늘어졌다.
도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잠들지 않은 채였다.
서윤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저 문틈으로 지켜보았다.
숨소리를 낮췄다.
심장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윤의 시선이 탁자 위 촛대로 향했다.
촛불이 흔들렸다.
바람이 없는데도.
서윤은 숨을 죽였다.
혹시 창문이 열려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방 안을 살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커튼도 미동이 없었다.
촛불이 한 번 더 크게 흔들렸다.
마치 누군가 입으로 불어낸 것처럼.
불꽃의 끝이 옆으로 길게 눕혀지듯 휘어졌다가, 다시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서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문을 조용히 닫고 뒷걸음질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건 착각이 아니었다.
두 번. 유모의 말이 있었고, 지금 그녀 자신의 눈으로도 확인했다.
우연이 두 번 겹칠 확률은 낮았다.
그녀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남편에게 말해야 할까.
아니면 좀 더 확인해야 할까.
남편은 지금 지방 순시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돌아오기까지 며칠이 더 걸릴 것이었다.
그 며칠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서은의 방문 앞을 지날 때, 문틈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서은은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딸에게 먼저 말해야 할지, 남편에게 먼저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서은은 도윤의 누나였다. 이 집안에서 가장 먼저 마력을 각성한 아이.
동생의 일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서윤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서은이었다.
방문을 열고 나온 그녀의 눈이 서윤을 향해 있었다.
"도윤이 방에서 나오셨네요."
서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방금까지 그녀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딸이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서은의 시선이 도윤의 방문을 향했다.
입가에 미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은 웃음도 아니었고, 놀람도 아니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는 듯한, 그런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