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밤, 나는 김순자 아주머니 댁 마당에서 설아에게 죽 한 그릇을 먹이며 낮의 일을 곱씹고 있었다. 설아는 숟가락을 쥔 손이 아직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는데, 그게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죽 그릇을 밀어주며 "천천히 먹어." 하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는 설아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며 혀를 끌끌 찼다.
"이런 어린 애를 이렇게까지..." 하고 아주머니가 중얼거렸는데, 그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 빗질하는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도훈아, 너 이번엔 진짜 큰일 낸 거 아니냐. 조태민이 그 인간, 뒷배가 만만치 않다고 들었는데." 라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괜찮을 거예요." 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나조차도 확신은 없었다. 말을 뱉으면서도 속으로는 '괜찮을 거라는 근거가 뭔데'라는 자문이 따라붙었다. 다만 낮에 얻은 시스템 알림—세계 최초 기록이라는 문구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게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지금으로선 전혀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세계 최초라는 말은 듣기에는 근사했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눈에 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는 처지였다. 시한부에 걸린 몸으로 세계 최초 타이틀을 달고 다닌다는 건, 어떻게 보면 자살 광고나 다름없었으니까.
아주머니는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저 설아의 등을 토닥여주기만 했다. 설아는 죽 그릇을 반쯤 비운 채로 아주머니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았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오늘 하루가 이 아이에게 얼마나 길었을지 가늠해보려 했다.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조차 하루 사이에 인생이 뒤집힌 마당에, 노예로 팔려 곽거한 앞에 서 있던 이 아이의 하루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
그 시각, 청람국 수도의 노예상 조합 본부에서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조태민은 보고를 받은 직후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리쳤다.
퍼억.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이 그 충격으로 튀어 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곽거한이 당했다고? 그것도 산골 촌놈한테?" 하고 그가 언성을 높이며 되물었는데, 그의 앞에 선 부관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예, 그렇습니다... 촌놈이 팔을 부러뜨리고, 대검까지 빼앗았다고 합니다."
"그놈 정체가 뭐라고?" 라고 조태민이 다시 물었지만, 부관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소하촌에 사는 평범한 청년이라는 말밖에는..."
"평범한 청년이 곽거한을 이겼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조태민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는 깨진 찻잔 조각을 발끝으로 밀어내며 다시 물었다. "곽거한이 데려간 애들은 뭐 하고 있었어. 다 같이 몰려가서 촌놈 하나를 못 잡아?"
"그, 그건..." 부관이 말을 더듬었다. "동행했던 병사들 말로는, 애초에 손을 쓸 틈도 없었다고 합니다. 대검을 든 곽거한이 그대로... 그대로 당해서."
조태민은 미간을 좁힌 채 창밖을 응시했다. 그는 노예상 조합에서만 이십 년 가까이 몸을 굴려온 인물이었고, 그 세월 동안 웬만한 강자는 얼추 알아본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다. 곽거한이라는 이름이 그 바닥에서 결코 가벼운 이름이 아니라는 것도, 그가 데리고 다니는 용병들이 최소한 촌구석 청년 하나쯤 상대로 밀릴 수준이 아니라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보고는 그의 상식으로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산골 마을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청년이 자신이 부린 용병단의 두목을 손쉽게 제압했다는 사실은, 그가 알고 있는 어떤 등급 체계로도 분류가 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합 내에서는 뭐라던가?" 하고 그가 부관에게 물었다.
"의견이 갈립니다... 일부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자는 쪽이고, 일부는 조합의 위신을 위해 응징이 필요하다는 쪽입니다." 라는 게 부관의 대답이었다.
"위신은 무슨 위신." 조태민이 낮게 내뱉었다. "위신 세우려고 병력 보냈다가 또 당하면 그게 진짜 위신 깎이는 일이지."
부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조태민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태민은 잠시 침묵했다. 조합의 위신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병력을 더 보내는 게 옳은 선택인지,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청년의 실체를 먼저 파악하는 게 더 신중한 판단인지, 그는 저울질하듯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만약 소문처럼 그 청년이 정말로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진 자라면, 무작정 병력을 보내는 건 오히려 조합에 더 큰 손실을 안길 수도 있었다. 조합의 병력이라는 게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크게 깎여나가면 이 바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소문이 퍼져 다른 조합들이 하이에나처럼 몰려드는 법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그저 운이 좋았던 촌놈이라면, 이번 일을 그냥 넘겼다가는 조합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게 뻔했다.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에서 그는 도무지 어느 쪽으로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
"...일단 정보를 더 모아." 라고 그가 결론을 내렸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라. 그 촌놈이 대체 뭐 하는 놈인지, 배경이 있는 건지, 그냥 우연히 강한 건지, 그것부터 알아내야 해." 라는 지시였다.
"몇 명이나 붙일까요?" 부관이 물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놈들로만." 조태민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소하촌이라는 데, 촌놈 하나 말고 뭐가 있는지도 같이 알아봐. 혹시 그놈 뒤에 뭔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부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지만, 조태민의 표정에는 여전히 짙은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부리던 소녀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골머리를 앓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노예 하나 팔고 사는 데 이 정도 신경을 쓴 적이 있었나, 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 일이 이대로 조용히 묻히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만은 갈수록 짙어지고 있었다.
*
다시 소하촌의 밤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설아가 잠든 방 앞에 앉아 상태창을 다시 열어보고 있었다. 낮의 전투 덕분인지, 스탯이 소폭 상승해 있었다.
[힘: 3 → 5 / 민첩: 6]
'...실전을 겪으면 오르는 건가.' 하는 추측이 섰다. 곽거한을 상대로 한판 붙은 것치고는 그리 큰 폭의 상승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치도 아니었다. 애초에 3이라는 숫자에서 시작했으니, 두 배 가까이 뛴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 힘을 진짜로 봉인에서 풀어내려면, 결국 더 많은 싸움을, 혹은 그 무명의 탑이라는 곳에 직접 들어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 탑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거였지만.
시한부 페널티까지 남은 날은 이제 이십구 일. 나는 그 숫자를 다시 한번 곱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십구 일이라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지 짧게 느껴질지는, 순전히 그 안에 내가 뭘 해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이 세계는 나에게 여유를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곽거한을 이긴 지 하루도 안 되어 노예상 조합 본부에서 벌써 이런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내가 알았다면 아마 한숨이 두 배는 더 나왔을 것이다.
방문 틈으로 설아의 자그마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얕은, 겨우 안심하고 잠든 사람의 숨소리였다. 오늘 하루만에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을 텐데, 정작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조태민이라는 자가 결코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직 말해주지 못한 상태였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도 감이 서지 않았다. "너를 산 놈은 아직 살아있고, 그놈 뒤에는 더 무서운 놈이 있다"는 말을, 이제 겨우 죽 한 그릇 먹고 잠든 아이한테 어떻게 꺼내야 하나.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서둘러 찾아야 할 그 탑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조차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상태창을 아무리 뒤져봐도 탑에 대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다들 그런 게 있다는 소문만 들어봤다는 식이었다. 소문의 근원을 찾자니 시간이 걸릴 것 같았고, 시간을 아끼자니 무작정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래저래 답이 안 보이는 밤이었다.
그때, 마당 쪽에서 낮게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순자 아주머니 댁 개는 평소 낯선 인기척이 아니면 짖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그 소리가 어딘가 이상하게 다급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뚝 끊겼다.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의 설아는 여전히 깊게 잠들어 있었고, 마당은 어느새 지나칠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