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단검이 뽑히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먼저 계산이 섰다. '지식의 서고'가 자동으로 뭔가를 분석하고 있었다는 걸, 그 순간 눈앞에 스쳐 지나가는 정보들로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체중 이동, 팔꿈치의 각도, 단검을 휘두를 궤적—전부가 마치 슬로모션처럼 눈에 들어왔는데, 이게 참 묘한 감각이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아서 상대의 근육 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발끝이 어느 방향으로 힘을 싣고 있는지까지 하나하나 분해해서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쳤다가, 곧바로 다음 정보에 밀려 사라졌다.
"덤벼봐, 촌놈아." 하고 남자가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는데, 나는 그저 상체를 살짝 옆으로 트는 것만으로 그 칼끝을 피해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내 눈에는 상대의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예고편처럼 미리 보이고 있었다는 게 진짜였다. 마치 누군가 미리 각본을 짜서 나에게만 슬쩍 보여준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 단검이 지나간 자리를 눈으로 쫓으며, 나는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했다. '용병이라기엔 몸놀림이 너무 뻣뻣한데. 조태민이라는 놈이 데려온 게 이런 애들뿐인가.' 하는.
[스킬 '지식의 서고'가 실전 데이터를 수집합니다. 전투 응용력이 상승합니다.]
이런 알림이 뜬 걸 보고, 나는 잠깐 헛웃음이 나왔다. 실전 데이터라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소녀를 구하려다 칼침이나 맞고 죽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상황이 손안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남자가 두 번째 칼질을 시도했을 때, 나는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힘을 실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관절이 꺾이는 정확한 방향으로 손목을 비틀었을 뿐인데, 그 각도가 마치 미리 계산된 좌표처럼 눈앞에 그려져 있어서 손이 그 좌표를 따라가듯 움직였다.
파그작!
남자의 팔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고, 그가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놓쳤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속이 살짝 뒤틀렸다. 사람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실제로 들은 게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불쾌감을 곱씹을 시간도 없었다.
"으아악! 이 새끼가!" 하고 옆에 있던 다른 남자가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나는 이미 그 궤적을 계산하고 있었다. 몽둥이가 그리는 반원의 크기, 남자의 팔 길이, 그가 힘을 주는 시점까지도 전부 눈에 들어와서, 굳이 피할 필요조차 없다는 판단이 섰다.
퍽!
몽둥이가 내 어깨를 쳤는데,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마치 두꺼운 옷을 입고 맞은 것 같은 감각이었다. 살이 눌리는 압력은 분명히 느껴지는데, 그 압력이 통증으로 변환되는 지점에서 뭔가가 중간에 끼어 그걸 걸러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태창에 스쳐가는 알림이 곧바로 답을 줬다.
[안내: '지식의 서고' 효과로 타격 시 최적의 근육 긴장 및 골격 배치를 자동 적용, 물리 피해가 대폭 감소합니다.]
요컨대 몸은 여전히 평범한 인간의 몸인데, 그 몸을 다치지 않게 쓰는 방법을 내 안의 지식이 실시간으로 계산해준다는 뜻이었다. 맞는 순간 근육을 어느 정도 긴장시켜야 하는지, 뼈의 배치를 어떻게 틀어야 충격이 분산되는지, 그런 걸 몸이 알아서 조율해준다는 소리인데, 이게 말이 되나 싶으면서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개사긴데?'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힘 스탯 3짜리, 그야말로 종잇장 같은 몸으로 몽둥이를 맞고도 이 정도라면, 대체 이 스킬의 진짜 값어치는 어디까지인가 싶었다.
나는 몽둥이를 든 남자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꺾었고, 그 역시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놓았다. 두 남자가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팔을 부여잡은 채 신음하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묘하게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병원 침대에서 숨죽이던 처지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사람 둘을 손쉽게 제압하고 있다니. 인생이라는 게 참 예측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그 와중에도 스쳐 지나갔다.
덩치 큰 남자가 마지막으로 소녀의 목줄을 놓고 도망치려 했지만, 나는 그의 뒷덜미를 잡아 세웠다. 그의 몸이 순간 뻣뻣하게 굳는 게 손끝으로 느껴졌다.
"이 아이는 이제 내가 데려간다." 라고 말했는데, 나조차도 그 말이 어디서 나온 확신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이거 뭐라고 말하는 거야, 나' 하는 자조가 동시에 들었다.
"조태민 님이 가만 안 있을 텐데." 하고 남자가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나는 이미 그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태민이라는 이름이 두 번째로 나왔다는 걸 머릿속 한구석에 저장해두면서도, 지금 당장 그 문제를 파고들 여유는 없었다.
소녀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그녀는 여전히 흙바닥에 웅크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두려움과 의구심이 뒤섞여 있었고, 얇은 어깨는 마치 겨울바람 앞에 선 나뭇가지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하고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 대신 몸을 더욱 움츠렸다. 마치 다음에 올 폭력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였다.
"때리려는 거 아니야." 라고 다시 말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이 아이가 대체 얼마나 오래 이런 대우를 받아왔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 속이 조금 답답해졌다.
"이름이 뭐야?" 하고 물었더니,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아입니다."
"설아라고. 좋은 이름이네." 라고 말하며 나는 그녀의 목에 걸린 쇠 목줄을 살펴봤다. 자물쇠 구조가 단순해 보였고, 지식의 서고가 자동으로 그 취약점을 분석해줬다. 걸쇠가 물리는 각도, 스프링의 탄성, 그 안쪽 핀 하나의 위치까지 눈에 들어오는 게, 마치 자물쇠 내부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자물쇠 부분을 짚었다.
콰크작.
허무할 만큼 쉽게 목줄이 풀어졌다. 설아는 목이 자유로워졌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는 듯, 몇 번이나 손으로 목을 만지며 나를 올려다봤다. 손끝이 목줄이 남긴 붉은 자국을 더듬는 걸 보면서, 나는 저 자국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얼마나 여러 번 새로 생겼다가 옅어졌다가를 반복한 흔적인지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주인님...?" 하고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는데, 나는 그 호칭이 당황스러웠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안심이라고 판단했으니까. '주인님이라니, 나는 그냥 이름 하나 물어본 게 전부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아이의 세계에서는 목줄을 풀어준 사람이 곧 주인이라는 등식이 이미 성립해 있는 듯했다.
[안내: 특수 조건이 충족되어 '보호자 계약'이 형성되었습니다.]
[해당 계약은 별도의 절차 없이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유지되며, 강제 해지는 불가능합니다.]
이건 또 무슨 알림인가 싶었다. 강제 해지가 불가능하다니, 이거 혹시 무슨 노예 계약 같은 시스템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잠깐 스쳤지만, 지금은 그런 시스템 문구를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나에게 쏠려 있었고, 그중 몇몇은 이미 조태민 조합에 이 소식을 알리러 뛰어가는 눈치였다. 등을 돌리고 후다닥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는 뒷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이 마을에서 조태민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다시금 실감했다.
나는 설아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여전히 걸음이 불안했지만, 내 옷자락을 꼭 붙잡은 채 따라 걸었다. 몇 발자국을 걷는 동안에도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게, 아직도 누군가 쫓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경계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모습이었다.
김순자 아주머니 댁으로 향하는 길, 나는 머릿속으로 방금 벌어진 일을 정리해봤다. 처음으로 힘을 실전에서 써봤고, 그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상대는 그저 평범한 용병 나부랭이였을 뿐이지만, 나는 그들을 상대하며 단 한 번도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이게 힘 3짜리 몸으로 되는 거라니.'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 힘이 완전히 봉인 풀리면 대체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몽둥이에 맞고도 옷 위에 맞은 것처럼 무덤덤했던 그 감각을 떠올리면, 이 스킬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미 이 세계의 상식을 한참 벗어난 존재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뿌듯함도 오래가지 못했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필의 말발굽 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아의 손이 내 옷자락을 움켜쥐는 힘이 순간적으로 강해졌고, 나는 그 떨림을 손끝으로 느끼며 이번에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