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내 이름은 이도훈이다. 청람국 변두리, 지도에서마저 손톱만큼의 자리를 차지하는 소하촌이라는 산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으니, 스물셋 평생 본 것이라곤 산과 논과 흙길뿐이었다는 게 그리 자랑할 일은 아니었다. 부모는 내가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들었고, 그 빈자리를 채워준 건 옆집에 사는 김순자 아주머니였는데,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굶어 죽었거나 아니면 산짐승 밥이 됐을 거라는 게 마을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아주머니는 늘 나를 보면 "도훈아, 밥은 먹었냐" 하고 물었고, 나는 늘 "예, 먹었습니다" 하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반쪽만 먹은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나는 딱히 대단할 것도 없는, 그저 나무를 패고 밭을 갈고 어쩌다 산짐승을 잡아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아가는 흙수저 청년이었다는 뜻인데, 그날 아침까지는 정말로 그랬다.
산 중턱에서 도끼질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도끼머리가 나뭇결을 파고드는 소리, 콱, 콱, 하는 그 익숙한 리듬 사이로 갑자기 머릿속이 뒤흔들리는 듯한 두통이 밀려왔는데, 처음엔 그저 어제 술을 좀 과하게 마신 탓인가 싶었다. 어젯밤 마을 잔치에서 얻어 마신 막걸리가 두 사발쯤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짐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통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거대한 서고를 통째로 쏟아붓는 듯한 느낌이었고, 나는 도끼를 떨어뜨린 채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고,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가 다시 캄캄해지는 게, 마치 벼락을 직접 맞은 것 같았다.
[알림: 미지의 정보가 감지되었습니다.]
눈앞에 대괄호로 감싸인 문장이 떠올랐다. 이건 또 뭔가 싶었지만, 그 놀라움조차 온전히 느낄 새가 없었다. 그다음 순간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건물이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도시의 풍경, 손바닥만 한 판에서 빛이 나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장면, 수백 개의 창문이 반짝이는 밤거리, 사람들이 쇠로 만든 상자 안에 들어가 순식간에 먼 곳으로 이동하는 장면까지—'지구'라는 이름의 행성에서 누군가가 살았던 삶의 기억들이 통째로 밀려들었다는 것을, 나는 그 정보가 다 들어차고 나서야 깨달았다. 국어, 수학, 과학, 심지어 게임이라는 것까지—그 모든 게 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는데, 정작 그게 '누구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것이라 하기엔 낯설고, 남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다. 특히 '레벨'이라느니 '스탯'이라느니 하는 낱말들이 유독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어서, 이게 대체 왜 이렇게 자세한지 스스로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다음 알림이 떠올랐다.
[히든 클래스 '이계 현자(異界 賢者)'가 각성했습니다.]
'이계 현자라니, 이름부터 거창하다' 싶었지만, 그 감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곧바로 이어진 문장 때문이었다.
[경고: 히든 클래스는 불완전한 상태로 각성되었습니다. 정신 코어가 극심한 불안정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30일 이내에 '무명의 탑' 5층을 등반하지 못할 경우, 정신 코어가 붕괴하여 자아를 잃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정도 다시 읽었다. 처음엔 이해가 안 됐고, 두 번째엔 설마 하는 마음이었고, 세 번째엔 '아, 이거 진짜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감았다 떴다가, 뺨을 두어 번 세게 때려보기도 했는데, 문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었다. 요컨대 정리하자면, 나는 갑작스레 초인적인 무언가를 얻었지만 그 대가로 삼십 일이라는 시한부 목숨을 걸게 된 셈이었다. 시스템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클래스라는 개념도, 전부 방금 밀려든 지구의 기억 속에서나 봤던 게임 용어였는데, 그게 지금 내 삶에 진짜로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어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되네?" 라고 혼자 중얼거려봤지만, 대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볼 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무명의 탑'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소하촌에서 나고 자란 스물세 해 동안, 나는 그런 이름을 가진 건축물이나 지형에 대해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을 뒷산 너머에 사람이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한다는 '귀곡산'이라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그건 탑이 아니라 산이었고, 그저 무서운 짐승들이 산다는 전설 정도로만 여겨지던 곳이었다. 마을 노인들은 술자리에서 그 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목소리를 낮추곤 했는데, 그건 진짜 무서워서라기보다는 그저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귀곡산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봤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어쩌면 그게 다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게 마을 젊은이들 사이의 은근한 농담이기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지구의 기억 속에서 배운 대로, 게임에는 '상태창'이라는 게 있었으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되뇌어보았다. '상태창.'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펼쳐졌다.
[이도훈 / 레벨 1 / 클래스: 이계 현자(봉인)]
[힘: 3 / 민첩: 3 / 지력: 999 / 마력: 999]
'...힘이랑 민첩은 이 정도면 그냥 동네 청년 그대로인데, 지력이랑 마력은 이게 뭐야.'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숫자의 격차가 너무 커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도끼 자루를 두어 번 세게 쥐어보았는데, 여전히 나무를 패던 그 손 그대로였고 특별히 힘이 세진 것 같지도 않았다. 지구의 기억을 통째로 얻어서 그런 건지, 지력과 마력 수치만 세 자리 숫자로 우뚝 솟아 있었고, 그 옆에는 '(봉인)'이라는 표시가 붉게 깜박이고 있었다는 게 신경 쓰였다. 봉인이라는 두 글자를 손끝으로 건드려보려 했지만, 상태창은 그저 반응 없이 그 자리에 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이 힘이라는 것도, 민첩이라는 것도, 지금은 그냥 잠들어 있는 상태라는 거겠지.' 하는 계산이 섰다. 즉 지금 내 몸은 여전히 나무를 패던 이도훈의 몸 그대로이고, 그 안에 진짜 힘이 봉인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그 힘을 깨우는 방법이, 어쩌면 그 '무명의 탑'을 오르는 것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라는 추측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왔다. 게임 속 히든 클래스라는 것들이 대개 처음엔 봉인 상태로 시작해서 특정 조건을 충족하면 해방되곤 했다는 지구 쪽 기억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게 지금 내 상황과 얼마나 맞아떨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방향은 하나로 좁혀지는 셈이었다.
서둘러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30일이라는 숫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 시간 안에 존재조차 모르는 탑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목덜미를 짓눌렀다. 도끼를 다시 집어 들고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나는 계속 되뇌었다. '귀곡산. 아무도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그 산.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릴 적 김순자 아주머니가 해주던 이야기 속에서, 귀곡산 안쪽 깊은 곳엔 하늘까지 닿을 듯한 검은 그림자가 서 있다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저 무서운 이야기의 한 조각으로만 흘려들었던 그 대목이 지금에 와서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만약 그 전설의 산이 진짜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탑을 품고 있다면, 나는 지금부터 삼십 일 안에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 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내려가는 발걸음이 자꾸만 헛디뎌졌다. 산길은 늘 다니던 그 길인데, 오늘따라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조차 어제와는 다르게 보였고, 발밑에 밟히는 흙과 낙엽의 감촉마저 새삼스러웠는데, 어쩌면 이게 다 방금 얻은 지구의 기억 때문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 탓인지, 아니면 삼십 일 시한부라는 사실이 모든 걸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산 너머, 안개에 가려 늘 흐릿하게만 보이던 귀곡산의 봉우리가 그날은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