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아니면 말을 안 하는 거야?" 고태산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는데,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능글맞은 여유 대신 진짜 걱정이 섞여 있었다. 그 낯선 진지함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다. 평소처럼 "쯔쯔, 신입 놈이 사고를 쳤네" 하고 놀렸으면 나도 받아칠 말이 있었을 텐데, 저렇게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물어보니 도리어 말이 안 나왔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그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흐릿하게 끊겨 있었고, 그 이상한 빛의 공간에서 있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목소리라는 존재가 있었고, 각성을 받아들이겠다고 했고,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더니 우두머리는 죽어 있었다.' 요약하면 그렇게 간단했다. 마치 게임 튜토리얼 끝나고 스킬 하나 배운 것처럼 깔끔하게 정리도 됐다. 그런데 그걸 그대로 말하면 브론즈 등급 사냥꾼이 아니라 미스릴 등급 기사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아니, 기사가 아니라 정신병원에 실려 갈 각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서 계약했습니다'라니, 이건 무당집 손님도 안 믿어줄 소리 아닌가.
"일단 몸부터 살펴보자." 고태산이 내 팔을 붙잡고 상처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의 손끝이 내 등짝과 옆구리를 눌러가며 지나갔는데, 놀랍게도 그 둔탁한 통증 외에는 별다른 부상이 없었다. 바위에 부딪혔던 자리조차 멍 하나 정도로 가볍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게 정상인가.' 나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서 옷을 걷어 올려 몸을 확인해봤다. 갈비뼈가 부러졌어야 할 자리, 근육이 찢어졌어야 할 자리, 다 멀쩍이 파랗게 물든 흔적만 남기고 조용히 아물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고태산이 그 모습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가고 입가에는 애매한 웃음이 걸렸는데, 그건 웃긴다는 뜻이 아니라 뭔가 이상하다는 뜻의 웃음이었다. "방금까지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던 놈이, 이제 보니 상처가 하나도 없네." 그의 말에는 의구심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운이 좋았나 봅니다." 그 말이 얼마나 궁색한지는 나도 알고 있었다. 마치 로또 1등 맞은 사람이 "그냥 숫자를 좀 잘 골랐습니다"라고 말하는 수준의 설득력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치자." 고태산이 팔짱을 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시선이 꽤 오래 머물러서 나는 괜히 딴 곳을 봤다. "근데 그 우두머리는 어떻게 죽은 거야? 네가 벤 것도 아니고, 내가 벤 것도 아닌데." 나는 그 질문에 순간 말이 막혔다. 사실대로 말하면 "제 안에서 뭔가 폭발했습니다" 정도인데, 이게 대답이 될 수는 없었다. "그, 그건… 저도 정신을 잃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반은 사실이었으니 양심에 덜 찔렸다.
고태산은 한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다른 무리가 냄새를 맡고 몰려올 수도 있으니까." 그가 주변을 경계하며 창을 다시 고쳐 쥐었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바위굴을 벗어나는 동안, 굴 안쪽 곳곳에 흩어진 마수의 잔해와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을 보고도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죽음에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지금 내 안에서 벌어진 일이 너무 커서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걸까.
구릉지를 내려가는 동안, 나는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깨달은 게 있었다. 저수익 의뢰라고 해서 늘 안전한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이 정체불명의 기프트가 이제는 더 이상 작은 떨림 정도로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손끝이 좀 뜨거워지는 정도였는데, 이번엔 아예 정신을 잃을 정도였잖아. 이게 계속 이런 식으로 커지면 언젠가는 숨길 수 없게 되겠지.' 그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손끝이 뜨거워지는 걸 감추는 건 장갑 한 짝으로 충분했지만, 우두머리급 마수를 통째로 태워버리는 걸 감추려면 대체 뭐가 필요한 걸까. 방화범 알리바이라도 하나 만들어둬야 하나. 나는 애써 그 불안을 눌러 담았다.
앞서 걷던 고태산이 흘깃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표정이 왜 그래. 아직도 무서워?" "아뇨, 그냥… 배가 고파서요." 나는 대충 둘러댔는데, 사실 그것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몸은 뭔가를 태워버린 만큼 허기가 졌다. 고태산이 피식 웃으며 "그 상황에서 배가 고프다는 소리가 나오냐" 하고 혀를 찼는데, 그 반응이 오히려 익숙해서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래, 이게 원래 우리 사이의 온도였지.
구릉지를 내려오던 중, 발밑의 흙이 갑자기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어!" 나는 균형을 잃고 옆으로 몸이 쓸려 들어갔는데, 고태산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그의 손끝이 내 옷깃을 스치듯 지나갔을 뿐, 잡을 수 없었다. 발밑의 땅이 마치 처음부터 얇은 껍데기였던 것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낙하하는 짧은 시간 동안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공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고, 흙과 돌 부스러기가 함께 쏟아지며 시야를 가렸다. 그 사이로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푸른빛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빛의 정체를 파악할 겨를도 없이 나는 바닥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 위로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보다 먼저 등에 느껴진 충격이 허파를 짓눌렀고, 잠깐 숨이 막혀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킨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곳은 자연적으로 생겨난 동굴이 아니었다. 벽면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표면은 손으로 쓸면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질 것 같았다. 그 표면에는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내는 문양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었는데, 문자인지 장식인지 구분이 안 되는 기하학적인 선들이 벽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아서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로 올라갈수록 빛이 점점 옅어지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바닥에는 습기 하나 없이 서늘한 공기만이 감돌았고, 흙 냄새 대신 어딘가 금속성인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건 뭐야, 던전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억지로 힘을 줘서 버텼다. 위쪽에서 고태산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울려왔다. "도현아! 도현아, 대답해!" 그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고, 나는 목이 터지도록 대답을 외쳤다. "여기예요!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꺼운 벽이 소리를 삼켜버리는 듯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외쳤지만 결과는 같았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별개의 세계인 것처럼.
혼자였다. 나는 이 낯설고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공간 한가운데에 서서, 어디로 이어질지 모를 어둠 속 통로를 바라보았다. 벽을 따라 이어지는 푸른 문양들이 마치 길잡이처럼 통로 안쪽으로 뻗어 있었는데,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게 맞는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저 멀리서 무언가가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무거운, 일정한 간격의 울림이었는데, 그것이 기계의 진동인지 살아 있는 생물의 심장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등줄기에 다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저수익 의뢰 하나 받았다가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검을 고쳐 쥐었다. 손잡이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미공개 구역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위안이 되는 건지, 아니면 더 무서운 일인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