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브론즈인데 왜 자꾸 들켜

4화

어둠 속에서 나는 발을 딛고 있었는데, 그곳이 땅인지 허공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발밑에 뭔가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몸이 둥둥 뜬 느낌도 들었다. 사방이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빛은 눈이 부시지도 뜨겁지도 않은, 어딘가 낯설고 기묘한 종류의 밝음이었다. 병원 대기실 조명 같기도 했고, 게임 로딩 화면의 배경 같기도 했다. '여기가 죽고 나서 오는 곳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딱히 무섭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이상하게 차분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에서든 이 세계에서든 이미 한 번 죽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일까,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 덜 두렵다더니, 그 말이 이런 데서 증명될 줄은 몰랐다. 나는 손을 들어 앞으로 뻗어보았는데, 손끝이 빛 속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살아 있는 몸인지, 아니면 영혼 같은 것만 남아 이곳에 떠 있는 건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몸이 있긴 있는 건가.' 그런 실없는 궁금증을 품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무언가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처음엔 흐릿한 안개처럼 뭉쳐 있던 그것이 점점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는데, 그러나 얼굴은 끝까지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만이 사방에서 울려왔다. "기프트의 각성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지만, 곧 냉소적인 생각이 뒤따라왔다. '드디어 정체를 밝히시는군. 그동안 손끝 떨림으로만 존재감을 알리다가 이제야 대사를 주시나.' 그동안 위기의 순간마다 손끝이 떨리고 몸속 어딘가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그게 무슨 신호인지 제대로 물어볼 상대조차 없었다. 이제야 그 원흉이 제 발로 나타난 셈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내가 묻자 그 형상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답했다. "저는 당신에게 귀속된 기프트의 관리 체계입니다. 편의상 목소리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그 딱딱한 어조가 어딘가 윤소하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이 위기 상황에서도 픽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체 왜 이 세계는 나를 둘러싼 존재들이 하나같이 저런 사무적인 말투를 쓰는 건지, 어디 공통 교육기관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름은 없습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명명되지 않았습니다. 필요하다면 사용자가 임의로 이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럼 목소리라고 부르지." 나는 대충 정리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이름 짓기 놀이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 우스웠지만, 이 상황 자체가 원래 우스웠으니 상관없었다. "각성이 지연되고 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묻자 목소리는 감정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당신의 기프트는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마다 일부가 발현되지만, 완전한 각성은 사용자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 의지를 거부해왔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거부했다기보다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렇게 속으로 항변했지만, 목소리는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당신의 신체는 위협에 노출될 때마다 방어적으로 기프트를 소량 발현시켜 생존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비효율적이며, 지속될 경우 신체에 축적되는 부담이 상당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왜 그동안 손끝이 떨리고 열기가 올라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동안 그냥 긴장해서 그런 거라고, 심장이 약해서 그런 거라고 스스로 둘러대며 넘겼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사실은 몸속에서 뭔가가 참고 참다가 새어나오는 소리였던 셈이다. "그럼 그 부담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뭡니까." 나는 캐물었다. 이왕 설명을 들을 거라면 제대로 듣고 싶었다. "신경계와 혈관계에 미세한 손상이 누적됩니다. 방치할 경우 사용자는 서서히 신체 기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는 소린가." "정확합니다." 목소리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 없이 그렇게 답했다. 이 자식은 위로도 모르는군, 하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관리 체계에게 위로를 바란 내가 잘못이었다.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내가 다급하게 묻자, 목소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현재 당신의 육체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으며, 기프트가 생존을 위해 강제적으로 발현되고 있습니다. 각성 여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 순간 눈앞에 흐릿한 문양들이 떠올랐는데, 붉은빛과 푸른빛이 섞인 복잡한 도형들이 허공을 가득 채우며 회전하고 있었다. 문양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서로를 스치고 겹쳐지며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고, 그 결마다 희미한 진동음이 울려 나왔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규모감만큼은 압도적으로 느껴졌다. '이게 무슨 게임 로딩화면 같은 건가.' 실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동시에 손끝에서부터 다시 뜨거운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열기는 마치 오래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빠르게 퍼졌고, 나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견뎌야 했다. "저 문양들은 뭡니까." 나는 손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당신의 기프트가 완전히 각성했을 때 발현될 형태의 일부입니다. 현재는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완성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각성 이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목소리는 끝까지 친절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스포일러라도 방지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저도 모르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지금은 따질 여유가 없었다. "선택하십시오." 목소리가 짧게 말했다. "각성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동안 유지해온 평범함은 되돌릴 수 없게 됩니다." "평범함이라는 게 정확히 뭘 의미합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브론즈 등급으로 위장한 삶, 주목받지 않는 위치, 눈에 띄지 않는 전투력을 의미합니다. 각성 이후에는 그것을 더 이상 온전히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그 대답에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동안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원했고, 브론즈 등급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가려 했다. 최소한의 존재감으로,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게, 그렇게 조용히 늙어가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죽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그 모든 계획을 뒤흔들고 있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는데, 평범하게 죽고 싶지는 않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온몸이 하얗게 타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시야가 완전히 빛으로 뒤덮였다. 마치 몸속의 모든 혈관이 동시에 열이 오르는 것처럼 뜨거웠고, 뼛속까지 저릴 정도로 강렬한 진동이 지나갔다. 목소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조차 어딘가 만족스러워 보였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딱딱한 흙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코끝에는 흙냄새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들어왔고, 귓가에는 누군가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건 고태산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는데, 그의 수염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현아, 정신이 드냐?" 그가 다급하게 물었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온몸에 퍼지는 둔중한 통증에 다시 주저앉았다. 마치 몽둥이로 뼈마디마다 두들겨 맞은 것 같은 감각이었고, 그 와중에도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이렇게 아픈데 살아있다는 게 다행이라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우두머리는..." 내가 힘겹게 묻자, 고태산은 잠시 침묵하다가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대한 고블린 우두머리가 목이 완전히 갈라진 채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 상처의 형태가 내 검으로 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깊었다. 절단면은 마치 예리한 도구로 단번에 그은 것처럼 매끈했고, 주변으로 흘러나온 검은 피가 흙바닥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가 저걸 벤 건가.'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고, 고태산의 눈빛 역시 나를 향해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도현아, 너 그때... 눈이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저놈 목을 그어버리더라고." 고태산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말투에는 두려움과 놀람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은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마치 뭔가 새로운 것이 몸속에 자리를 잡고, 그것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이게 각성인가.' 나는 그 생각을 하며 다시 고블린 우두머리의 사체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