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괴물에게 손 내민 성녀

2화

박현우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짐승의 손톱이 내 이마를 긁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재수 없는 산짐승 새끼.' 그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왕전 당시 박현우는 내 등을 세 번이나 지켜준 사람이었다. 첫 번째는 마왕성 지하 통로에서,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촉수를 그가 방패로 받아냈다. 두 번째는 마왕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부관과의 싸움에서, 내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을 때 그가 앞을 막아섰다. 세 번째는 마왕성 최상층, 마왕이 마지막 발악으로 쏘아낸 화염구 앞이었다. 그가 방패로 막아준 그 화염구 덕분에 나는 마왕의 심장에 검을 꽂을 수 있었다. 그때 그는 내게 씩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도윤아. 다음엔 네가 내 등 좀 지켜줘라." 나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한 채 짐승 취급을 하고 지나갔다. '당연하지. 이 몰골로 누가 나를 알아보겠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비늘 같은 피부가 손등에 걸려 따가웠다. 손톱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검은 발톱 같은 것이 자라나 있었고, 그마저도 끝이 갈라져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다시 무릎 사이에 숨겼다.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나는 물었던 질문을 다시 곱씹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인간의 목소리로 이름을 불린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낙엽 밟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볍고 조심스러운 걸음, 중간중간 멈춰서 뭔가를 살피는 듯한 리듬. 윤서아였다. "도윤아, 나 왔어." 동굴 입구에서 그녀가 밝게 외쳤다. 나는 그림자 속에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서아는 낡은 흰색 로브 위에 갈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왼손에는 대나무로 짠 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삶은 감자와 육포, 작은 물통이 담겨 있었다. 서아의 나이는 스물셋, 나보다 두 살 어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는, 산길을 두 시간이나 걸어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옷차림이 깔끔했다. 다만 신발 밑창에는 붉은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로브 자락 끝에는 나뭇가지에 긁힌 자국이 몇 줄 나 있었다. 바구니 손잡이를 쥔 손등에도 작은 상처가 하나 보였다. 아마 오는 길에 가시덤불을 헤치다 생긴 것 같았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서아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손짓으로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서아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누구 왔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허공에 대략적인 모양을 그렸다. 검, 갑옷, 어깨에 찍힌 문양. 서아는 그 손짓을 한참 지켜보다가, 낮게 숨을 삼켰다. "박현우 씨...였어?"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괜찮아? 그 사람이 뭐라고 안 했어?" 나는 대답 대신 시선을 떨어뜨렸다. 서아는 그 반응만으로 모든 걸 알아챈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뭐라고 했는데." 내가 손가락으로 다시 허공에 글자를 그리려 하자, 서아가 내 손을 붙잡아 멈췄다. "말 안 해도 알 것 같아."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내가 진작 이 근처로 오는 길을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어야 했는데." 서아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그녀는 내 손, 흉측하게 변한 그 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두 손으로 감쌌다. 발톱처럼 갈라진 손톱 끝이 그녀의 손바닥을 긁을 법도 한데, 그녀는 조금도 움츠리지 않았다. "이 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는지, 그 사람들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 서아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따뜻한 손의 감촉이 낯설고도 익숙했다. 서아는 바구니에서 삶은 감자를 하나 꺼내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손끝이 야무지게 움직였다. "오늘은 감자를 좀 더 많이 삶아왔어. 요즘 날이 추워져서 든든한 게 필요할 것 같아서." 그녀가 감자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목에 걸려." 서아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 웃음이 억지로 지어낸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서아가 산을 내려간 뒤 나는 동굴 안 마른 풀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천장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 년 전, 마왕전이 시작되기도 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내가 아직 인간의 몸이었던 시절이었다. 왕실 기사단 훈련장 한쪽, 파티 편성이 막 끝난 직후였다. 나는 스무 살, 검을 든 지 십 년째 되는 해였다. 훈련장 게시판에는 새로 편성된 파티 명단이 붙어 있었고, 내 이름 옆에는 '성녀 후보 윤서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시 나는 그 이름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성녀 후보들이 파티에 배속되는 일은 흔했고, 대개는 몇 달 안에 다른 파티로 옮겨지기 마련이었다. 윤서아는 신전에서 파견된 성녀 후보로, 그때 나이 열여덟, 이제 갓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다. "저, 강도윤 님이시죠?"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던 게 기억난다. 그녀는 흰 로브 자락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로브는 갓 지급받은 듯 빳빳했고, 소매 끝에는 신전의 문양이 금실로 수놓여 있었다. "네, 맞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서아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그날 훈련장을 나서며, 박현우가 내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물었다. "신입 성녀, 되게 얌전하던데?" "그런가." 나는 짧게 대답했었다. "저런 애가 마왕성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박현우가 웃으며 던진 그 말에, 나도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때는 그녀가 이렇게 오랜 시간, 이렇게 깊은 산속까지 나를 찾아올 사람이 될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는 박현우가 언젠가 나를 짐승이라 부르며 걷어차는 날이 올 줄도 전혀 알지 못했다. 동굴 천장의 물방울 소리가 계속 이어졌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다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서아가 다시 올 시간이 될 때까지 나는 그 첫 만남의 기억을 몇 번이고 다시 되짚어보았다. 그리고 문득, 내일도 그녀가 이 길을 올라올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박현우가 이 근처를 다시 지나간다면, 그가 서아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만약 그가 서아에게, 내가 어디 있는지 캐묻는다면. 나는 그 생각에 눈을 떴다. 똑, 똑, 똑. 물방울 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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