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지리산 깊은 골짜기,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침이었다.
새벽 공기는 아직 차가웠고, 동굴 입구에는 밤새 내린 이슬이 그대로 맺혀 있었다.
나는 동굴 앞에 쌓인 마른 나뭇가지를 한 아름씩 안아 옮기고 있었다.
손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이 것은 손가락 세 개가 뭉쳐 붙은 형태였고, 끝에는 짧은 발톱이 나 있었다.
발톱 길이는 대략 3센티미터쯤 되었는데, 그것으로 나뭇가지를 쥐는 일은 매번 서툴렀다.
나뭇가지를 쥘 때마다 발톱 사이로 나무껍질이 부스러져 떨어졌다.
한 번에 많이 옮기려다 절반은 흘리고, 그걸 다시 주우려다 또 흘리는 일을 벌써 여섯 번째 반복하는 중이었다.
'서아가 오기 전까지 이거라도 해놔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허리를 굽혔다.
몸이 커진 뒤로는 허리를 굽히는 것도 예전 같지 않았다.
키는 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졌고, 등뼈가 활처럼 굽어 있어서 잠깐만 서 있어도 등줄기가 뻐근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면 갈비뼈 안쪽에서 뭔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손목 안쪽, 원래 팔찌를 차던 자리에는 지금도 검은 비늘 같은 것이 무늬처럼 남아 있었다.
마왕을 벤 순간 그 자리로 스며든 마기의 흔적이었다.
윤서아는 그 자리를 매일 아침 손으로 짚어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비늘의 색이 조금이라도 진해지면 서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 옆에서 나는 그저 얌전히 손을 내밀고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산 아래 마을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두 시간, 서아는 보통 정오쯤에 도착했다.
가끔은 배낭에 삶은 감자나 옥수수를 챙겨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붕대와 소독약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
오늘은 무엇을 가져올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해의 위치를 가늠했다.
아직 아침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비스듬히 떨어지는 걸 보니, 정오까지는 한참 남은 듯했다.
나는 나뭇가지 더미를 동굴 입구 옆에 쌓아두고, 그 위에 낡은 방수포를 덮었다.
방수포는 서아가 지난주에 가져다준 것이었다.
색이 바랜 초록색이었고, 한쪽 귀퉁이가 불에 탄 자국으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
서아는 그 방수포를 어디서 구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는데, 나는 그게 마을 사람들 몰래 훔쳐온 것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방수포 끝을 돌멩이로 눌러 고정하는 일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돌멩이 세 개를 각 모서리에 놓고, 마지막 하나는 가운데에 얹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서아는 걸을 때 발끝을 먼저 딛는 습관이 있어서 소리가 가볍고 짧게 끊어졌는데, 지금 들리는 소리는 발바닥 전체가 낙엽을 짓누르는 무거운 소리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동굴 안쪽 그림자로 반쯤 몸을 숨겼다.
숨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다물고, 가슴을 최대한 좁게 만들었다.
"뭐야, 이 산에 이런 게 있었나?"
낮게 깔린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죽인 채 나무 그늘 사이로 그를 살폈다.
갈색 가죽 갑옷, 허리에 찬 장검, 왼쪽 어깨에 찍힌 왕실 기사단 문양.
갑옷 어깨 부분에는 은실로 수놓은 별 모양 장식이 붙어 있었는데, 그건 기사단 내에서도 일정 계급 이상만 달 수 있는 표식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
마왕전에서 항상 내 오른편을 지키던 얼굴이었다.
박현우였다.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반가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와,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현우야.'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그를 불렀다.
머릿속으로는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되풀이해 불렀다.
목구멍에서는 낮은 짐승의 울음소리만 새어나왔다.
"으르렁..."
박현우의 눈빛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그는 검자루에 손을 얹은 채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발끝이 낙엽을 밀어내며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뭔 몰골이 이래."
박현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려 했다.
발을 뗄 때마다 관절에서 뼈가 어긋나는 듯한 통증이 스쳤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박현우가 검을 반쯤 뽑으며 소리쳤다.
"오지 마! 오면 벤다!"
칼날 일부가 스르릉 소리를 내며 햇빛에 반사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손을 들어 그를 향해 내밀었지만, 그 손이 얼마나 흉측해 보이는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검은 발톱, 갈라진 피부, 군데군데 돋아난 회색 뿔 같은 돌기들.
손등 위로는 핏줄처럼 검은 실선이 뻗어 있었는데, 그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박현우는 그 손을 보고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산짐승 새끼가... 재수 없게."
그가 침을 뱉듯 내뱉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답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으니까.
목소리를 내려 할수록 목구멍만 뜨거워졌고, 결국 나오는 건 짐승의 소리뿐이었다.
박현우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에이, 재수 없어. 오늘 사냥은 다른 데서 하자."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산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은 예전과 똑같았다.
어깨를 곧게 펴고 걷는 걸음걸이, 검을 다루는 손목의 각도, 그 모든 것이 마왕전에서 함께 싸우던 그날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나였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두 시간 전만 해도 무너지지 않았던 무언가가, 그 짧은 순간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동굴 벽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등이 바위에 닿는 순간, 차가운 감각이 등뼈를 타고 올라왔다.
'현우야, 나야. 강도윤이야.'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그 문장을, 나는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같이 마왕성 계단을 오르던 밤이 생각났다.
그날 그는 내 등을 두드리며 웃었었다.
'다 왔어, 도윤아. 조금만 더 가면 끝이야.'
그 말을 하던 목소리와, 오늘 나를 향해 "재수 없어"라고 내뱉던 목소리가 같은 사람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건 매끈한 피부가 아니라 거친 각질과 돌기들이었다.
이 손으로는 무엇을 해도 예전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동굴 밖,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유난히 차가워 보였다.
정오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려 보려 했지만, 숫자를 세는 것조차 힘들었다.
서아가 오면 이 얘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넘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멀리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흠칫 몸을 떨며 동굴 입구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박현우가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가 다른 기사들을 데리고 오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