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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전 7시. 학원 실기장. 바닥에 서리가 앉아 있었다. 숨을 쉬면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나는 이제 맨 앞줄로 옮겨졌다.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맨 뒷줄, 벽에 가장 가까운 자리였다. 지팡이도 남의 것을 빌려 썼고, 화염구는 손바닥만큼도 안 됐다. 지금은 달랐다. "이도현, 시전." 정민호 선생님이 불렀다. 목소리에 이제 관심이 섞여 있었다. 예전엔 내 이름을 부를 때 짜증이 섞여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자세를 잡았다. 왼발을 반보 앞으로. 지팡이 끝을 정확히 정면으로. 주문을 외웠다. 이그니스, 페르바그란데. 중급 화염구가 만들어졌다. 일주일 전보다 훨씬 크고 안정적이었다. 불꽃 표면이 흔들리지 않았다. 가장자리가 선명했다. 옆줄에 서 있던 학생들이 나를 쳐다봤다. 누군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자식 진짜 빨리 크네." "몰라. 요즘 갑자기 저래." "훌륭하다." 선생님이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아무 기쁨이 없었다. 예전엔 그 말을 듣는 게 꿈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당연한 것처럼 들렸다. 화염구가 사라지고 지팡이를 내렸다. 손끝에 남은 열기를 느껴보려 했다. 뜨거웠다. 분명히 뜨거웠다. 그런데 그 뜨거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성취감이라거나 뿌듯함이라거나, 그런 게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빈 자리를 손끝으로 만지는 기분이었다. 오후 4시. 원장님실. 책상 위에 학비 명부가 펼쳐져 있었다. 원장님이 손가락으로 내 이름 옆 칸을 짚었다. "이번 달은 안 밀렸구나." 원장님이 말했다. 표정에 안도가 있었다. 지난달까지 나는 매달 명부 맨 아래, 빨간 줄이 그어진 이름이었다. 원장님이 그 빨간 줄을 지우는 걸, 나는 옆에서 봤다. 마법 실력이 오르자 학원에서 장학금 대상자로 올려줬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그만둘 수 있었다. 편의점 야간 조. 청소 용역. 둘 중 하나를 버릴 수 있었다는 건, 몇 달 전의 나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좋은 일이었다.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좋다는 느낌이 흐릿했다. 원장님이 나를 보며 웃었다. "고생 많았다. 도현이." "…네." 나는 대답하면서 내 목소리를 들었다. 평소와 같은 톤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원장님실을 나오면서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봤다.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오후 5시. 텃밭에서 보라를 만났다. 보라는 고무장갑을 낀 채 흙을 파고 있었다. 붉은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요즘 바쁘지." 보라가 말했다. 허리를 펴며 나를 올려다봤다. "어." "밥은 먹었어?" "아직." 보라가 감자를 내밀었다. 방금 삶은 것인 듯 김이 올라왔다. 예전과 같은 감자였다. 십 년 전, 처음 이 텃밭에 왔을 때도 보라는 이렇게 감자를 내밀었다. 그때는 손이 작아서 감자 하나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나는 그걸 받았다. 입에 넣었다. 따뜻했다. 그런데 그 온기가, 예전과 달랐다. 예전엔 보라가 준 감자를 먹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배가 아니라 마음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그냥, 감자였다. 따뜻한 음식. 그 이상이 없었다. 씹는 동안 나는 계속 내 안을 살폈다. 뭔가 느껴지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아무것도 없었다. "도현아." 보라가 나를 불렀다. "어." "요즘 표정이 이상해." "뭐가." "모르겠어. 그냥, 뭔가 빠진 것 같아." 보라가 고무장갑을 벗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눈가에 흙이 조금 묻어 있었다. "마법은 잘하는데, 그… 예전 같지가 않아. 웃을 때도 뭔가." "뭔가 뭐." "그냥 웃는 것 같아. 진짜로 웃는 게 아니라." 나는 보라의 눈을 봤다.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눈빛에 마음이 아팠을 텐데. 고아원에서 지낼 때, 보라가 나 대신 혼나던 날이 있었다. 그날 보라 눈에 눈물이 고인 걸 보고 나도 같이 울었다. 그 기억은 있었다. 선명하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눈빛을 보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눈이었다. 두 개의 눈동자. 그 안에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걸 알겠는데, 그게 나에게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다. "아무 일 없어." 나는 대답했다. 목소리가 스스로도 낯설게 들렸다. 보라가 나를 잠시 더 바라봤다.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냥 고무장갑을 다시 꼈다. "밥 챙겨 먹어. 알겠지." "어." 나는 돌아섰다. 등 뒤로 흙을 파는 소리가 들렸다.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봤다. 보라는 다시 텃밭에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도, 아무것도 없었다. 밤 9시. 방으로 돌아와 벽을 봤다. 방은 좁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벽에 붙은 낡은 지도 한 장.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들었다. 낮에는 바빠서 몰랐는데, 조용해지니 그 텅 빈 느낌이 더 분명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보라와 처음 만났던 날. 고아원 마당에서 같이 울었던 날. 둘이 손잡고 밤길을 걸었던 날. 하나씩 떠올렸다. 보라의 여덟 살 적 얼굴. 마당에 서 있던 은행나무. 그날 밤 가로등 불빛. 그 기억들이 있었다. 선명하게 있었다. 그런데 그걸 떠올리는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진첩을 넘기는 것 같았다. 남의 사진첩을. 낯선 사람의 추억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분명 내 기억인데,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번 떠올렸다. 더 세게, 더 깊이. 보라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줬던 순간. "도현아." 그 목소리, 그 억양까지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기억을 떠올리는 지금, 가슴이 뛰지 않았다. "이상해." 나는 중얼거렸다. 손으로 가슴을 눌러봤다. 심장은 뛰고 있었다. 그냥 신체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뭐가 잘못됐는지, 확인해야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지팡이를 봤다. 그 지팡이 끝에서 나던 불꽃을 떠올렸다. 선명했다. 너무 선명했다. 마법은 선명한데, 왜 보라는 흐릿한가. 밤 10시. 나는 보라의 방문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렸다. 손이 떨렸다. 왜 떨리는지 몰랐다. "누구야." "나야." 문이 열렸다. 보라가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잠옷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이 시간에 왜." 나는 아무 말 없이 보라를 바라봤다. 얼굴, 눈, 붉은빛 머리카락. 십 년을 함께한 얼굴. 느껴야 했다. 뭔가를 느껴야 했다. 반가움, 그리움, 애틋함, 뭐라도.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숨이 막혔다. 목이 말랐다. 침을 삼켰는데 그마저도 뻑뻑했다. "도현아, 왜 그래." 보라가 물었다.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보라가 한 걸음 다가왔다.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그 손길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그런데 딱, 온도만 느껴졌다. "아니야." 겨우 그렇게 말했다. "미안,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 "뭘 확인해." 나는 뒷걸음질쳤다. 보라의 손이 내 팔에서 떨어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문을 닫고 돌아섰다. 복도를 걸으며 손을 봤다. 계속 봤다. 손끝에서 아까 그 마법 불꽃이 피어올랐다. 작고, 뜨겁고, 선명했다. 그 불꽃은 선명한데. 보라를 봤을 때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벽에 손을 짚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건 대가였다. 그것이 말한 대가가, 바로 이거였다. 마력을 얻은 대신, 보라에 대한 마음을 잃었다.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다른 이유일 수도 있었다. 스트레스일 수도, 피로일 수도. 그런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야." 나는 벽에 대고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닐 거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나는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돌아갈 곳도, 나아갈 곳도 없는 것 같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라가 있었다. 십 년을 함께한 사람이 저 안에 있는데, 문을 다시 두드릴 수가 없었다. 두드려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게,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러다 문득, 그 동굴이 떠올랐다.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낮고, 차분하고, 감정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 그것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대가는 네가 고르는 게 아니야. 내가 고르는 거야." 그때는 그 말을 그냥 넘겼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말이 전부였다. 확인해야 했다. 대가가 정확히 뭔지. 돌이킬 수 있는지. 나는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학원 뒷문을 지나, 골목을 지나, 도시를 벗어나는 길로 접어들었다.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 동굴이 있는 산 초입까지, 걸어서 삼십 분. 가는 내내 나는 손끝의 불꽃과 텅 빈 가슴을 번갈아 생각했다. 하나는 너무 선명했고, 하나는 너무 비어 있었다. 그 둘을 맞바꾼 게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돌이킬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나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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