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쿠오오오오-
요마가 울부짖었다.
생긴 건 곰이랑 멧돼지를 섞어놓은 것 같았는데, 크기는 그 둘을 합친 것보다도 컸다.
등에는 뾰족한 가시가 잔뜩 솟아 있었고, 입에서는 검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무슨 곰돼지야.' 나는 속으로 태클을 걸었다.
웃긴 별명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먼저 났다.
인간은 위기 상황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동물이라던데, 딱 지금 내가 그 증거였다.
[경고: 위협 감지]
'이건 좀 늦게 뜬 거 아니야?'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걸 느끼며 태클을 걸었다.
시스템이란 놈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꼭 죽기 직전에, 그것도 이미 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 뒤늦게 알려주는 게 특기인가 싶었다.
아니, 알려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순서가 문제였다.
경고는 위협을 감지하기 전에 떠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요마가 앞발을 들어 그대로 내려찍었다.
콰자자작!
땅이 움푹 꺼졌다.
다행히 나는 이미 뒤로 굴러 피한 상태였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 느낌이었다.
마치 게임 캐릭터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게임 캐릭터가 알아서 판단하고 회피하는 것 같았다.
'이게... 능력치 999+의 힘인가.' 나는 감탄했다.
생각하는 속도보다 몸이 더 빨랐다.
예전 회사원 시절엔 지하철 계단에서 발을 헛디디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반사신경이 완전히 다른 종족 수준이었다.
그때는 에스컬레이터 한 칸 차이로 지옥철을 놓치던 인생이었는데.
지금은 곰돼지의 앞발을 눈으로 보고 피하는 인생이 됐다.
인생 역전이라는 말이 이렇게 살벌한 방식으로 실현될 줄은 몰랐다.
"으윽..." 나는 몸을 일으키며 신음했다.
땅에 굴러서 생긴 흙먼지가 코로 들어왔다.
켁, 하고 기침이 나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요마가 다시 달려왔다.
발굽 소리가, 아니 발톱 소리가 땅을 울리며 가까워졌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랑 정확히 어긋나게 들려오는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더 무섭게 느껴졌다.
[상황: 회피 불가 판정]
'그건 좀 무섭게 알려주지 말라고.' 나는 속으로 울먹였다.
이럴 거면 그냥 조용히 있지, 왜 굳이 대괄호까지 쳐서 회피 불가라고 못을 박는 건지.
마치 시험 감독관이 "이 문제는 못 풀어도 됩니다"라고 미리 선언하는 것 같은, 그런 절망적인 배려였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굵은 나뭇가지를 움켜쥐었다.
'이걸로 어떻게 되겠어?' 스스로도 의심스러웠지만, 몸은 이미 자세를 잡고 있었다.
머리로는 아무 계산도 못 하고 있는데, 몸은 벌써 무릎을 굽히고 어깨를 낮추고 있었다.
이게 바로 몸이 기억한다는 그건가.
그런데 나는 이런 몸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엘프로 태어난 지 며칠 됐다고 벌써 전투 본능이 탑재됐다는 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요마의 앞발이 다시 날아왔다.
슈아아악!
나는 나뭇가지를 들어 그대로 맞받아쳤다.
퍼억!
의외의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요마의 앞발이 튕겨나가는 소리였다.
'뭐야, 방금 나뭇가지로 저 거대한 걸 밀어냈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손목이 얼얼했다.
그런데 그 얼얼함이, 아프다기보다는 오히려... 짜릿했다.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었나.
헬스장에서 바벨 몇 킬로 더 들었을 때랑은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요마도 놀란 눈치였다.
곰돼지 같은 얼굴에도 표정이란 게 있다면, 지금 딱 '뭐지?' 하는 표정이었다.
눈알을 두어 번 굴리는 게, 마치 방금 자기가 뭘 당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나도 이해가 안 되거든.'
[상태 이상: 신기 공명 시작]
'신기 공명? 그건 또 뭔데.' 나는 당황했다.
손에 든 나뭇가지가 갑자기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마치 게임에서 무기에 마법 부여가 붙는 이펙트 같았다.
초등학교 때 오락실에서 백원 넣고 아이템 뽑던 그 기분이랑 비슷했는데, 스케일이 완전히 달랐다.
[임시 스킬: 신기 진화 - 목장(木杖)]
'나뭇가지가 지팡이가 됐다고?' 나는 손에 든 물건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평범한 나뭇가지였던 게, 지금은 은빛으로 빛나는 매끄러운 지팡이 형태로 변해 있었다.
표면이 매끈했다.
방금 전까지 나무껍질이 붙어 있던 자리엔, 무슨 은세공을 한 듯한 결이 흐르고 있었다.
'이거 팔면 얼마 받을까.' 나는 생사가 오가는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역시 사람은 안 변한다.
아니, 엘프가 됐어도 안 변하는 건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요마가 다시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콰르릉-
공기가 진동하는 게 느껴질 정도의 포효였다.
방금 한 방 먹은 게 자존심이 상했는지, 눈에 핏발까지 서 있었다.
"에잇!" 나는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콰과과광!
지팡이 끝에서 뭔가 빛의 파동이 터져 나갔다.
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마치 예전에 보던 특촬물의 필살기 장면 같았는데, 문제는 그게 CG가 아니라 지금 내 손끝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거였다.
요마가 그대로 튕겨 날아가 나무 몇 그루를 부수고 쓰러졌다.
우지끈, 쿠당탕-
나무들이 도미노처럼 넘어가는 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조용해졌다.
'끝난 건가.' 나는 헐떡이며 상황을 살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방금까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던 게, 이제야 조금씩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요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히 쓰러진 채였다.
[요마 처치 완료]
'와.' 나는 순간 얼떨떨했다.
방금까지 죽을 뻔했는데, 정작 결과는 완승이었다.
덕후 30여 년 인생, 온갖 이세계물을 봐왔지만 진짜 이렇게 압도적인 첫 전투는 처음 겪었다.
주인공 버프라는 게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그동안 본 웹소설 주인공들이 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럼 그 수많은 먼치킨물 주인공들도 다 이렇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을까.
아니면 나만 유독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헉..."
뒤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숲 어귀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고아원에서 함께 심부름 나온 다른 아이였다.
또래보다 조금 작은 체구에, 늘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던 그 아이였다.
오늘 아침 심부름을 나눠 할 때, 나랑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겠다며 따라붙었던 게 떠올랐다.
그 아이는 방금 벌어진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표정이었다.
입이 딱 벌어져서, 다물어지지도 않는 채였다.
눈은 나와 쓰러진 요마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갔다.
마치 방금 본 걸 마치 자기 눈을 못 믿겠다는 듯이.
'아... 망했다.' 나는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숨겨야 했던 능력치가, 첫날부터 목격자를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계획이 있었는데.
초심자 코스프레로 눈에 안 띄게 살다가, 조용히 실력을 쌓고, 나중에 필요할 때만 힘을 드러내겠다는 그 알찬 계획이.
개시도 하기 전에 박살이 나버렸다.
"방금... 그거..."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게..."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렸다.
'999+의 능력치를 초심자 코스프레로 어떻게 커버하지.' 나는 머리를 굴렸다.
혹시 이거 꿈이라고 말하면 믿어줄까.
아니면 갑자기 조상님이 강림하셨다고 하면?
아니, 그것보다... 이미 늦었다는 걸, 나는 아이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눈빛은... 감탄과 두려움이 반쯤 섞인, 딱 신인 아이돌 무대를 직관한 팬의 표정이었다.
한 발짝, 두 발짝, 아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너, 너 진짜 엘프 맞아?" 아이가 다가오며 물었다.
"맞는데."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근데 이런 힘이 있어?" 아이가 재차 물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는데,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흥분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게 더 문제였다.
무서워하면 오히려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는데, 흥분한 애는 반드시 어디 가서 떠벌린다는 걸, 나는 30년 덕질 인생으로 알고 있었다.
'있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숲은 조용했지만, 마음은 조용하지 않았다.
이 소문이 얼마나 빨리 퍼질지, 그게 걱정이었다.
고아원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될까.
그 길이 몇 분이든, 아이의 입은 그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일 게 분명했다.
'오늘 저녁이면 온 고아원이 다 알겠지.'
내일이면 마을 전체가 알 테고.
그 다음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로 서늘한 게 흘러내렸다.
쓰러진 요마 옆에서, 나는 여전히 은빛으로 빛나는 지팡이를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아이의 눈은 여전히 그 지팡이에, 그리고 나에게, 번갈아 꽂혀 있었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했다.
그런데 뭘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