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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눈을 떴을 때, 처음 느낀 건 냄새였다. 풀냄새, 나무냄새, 그리고 알 수 없는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뭐야, 코가... 되게 좋아졌는데?'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시야도 이상했다. 색이 더 진하고, 더 선명했다. 마치 안경을 벗고 살다가 시력 2.0짜리 렌즈를 낀 느낌이었다. '이게 사후세계 기본 옵션인가.'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봤다. 귀가... 귀가 길었다. 뾰족했다. "오오오!"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엘프였다. 진짜 엘프였다. 손등의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였고,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서 보니 은색에 가까운 백금발이었다. '이거 완전... 판타지 소설 표지 아냐?' 나는 감탄했다. 거울이 있으면 얼굴도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낡은 마차 짐칸 안이라 그런 사치는 부릴 수가 없었다. 죽은 지 얼마 됐다고 벌써 신났다. 역시 사람은, 아니 엘프는, 안 변한다. [전생 완료] 대상: 리아 (구 강하늘) 종족: 엘프 연령: 신체 기준 15세 '15세?' 나는 순간 당황했다. 34살 회사원이 15살 엘프로 시작한다는 거였다. 뭐, 이세계 전생물에서 흔한 클리셰긴 했다. 마음 나이는 그대로인데 몸만 어린 상태. 이건 오히려 유리한 거 아닌가? 키가 작으면 눈에 덜 띄고, 어리면 방심도 사고, 무엇보다 사춘기를 다시 겪는 것보다는 그냥 성숙한 척하는 게 편했다. 적응 기간이 길어진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슬쩍 상태창을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밑도 끝도 없이 그런 게 뜰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런 촉은 회사에서 눈치껏 살아온 34년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상태창.'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러자 정말로 눈앞에 창이 펼쳐졌다. [이름: 리아] [종족: 엘프] [힘: 999+] [민첩: 999+] [마력: 측정 불가] [생명력: 999+] '999+가 뭐야.' 나는 눈을 비볐다. 숫자 자체가 이상했다. 보통 게임에서 999는 만렙 캡을 상징하는 숫자였다. 근데 그 뒤에 붙은 '+'라니. 이건 마치 만렙 찍고도 경험치가 계속 쌓이는 상태 같았다. 옛날 오락실에서 스코어판 숫자가 다 차서 자릿수가 넘어가버리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게 그... 규격외라는 건가.' 나는 짐작했다. 상급 천사가 말한 '신기의 힘이 스며든 영혼'이라는 게, 몸을 통째로 개조해놓은 모양이었다. 이럴 거면 진작 말이라도 좀 더 자세히 해주지, 그 천사는 죽을 때도 대충 설명하고 보내버렸다. [경고] 해당 능력치는 표준 엘프 기준의 상한선을 초과합니다. 종족 은폐 권장. '은폐 권장이라니, 게임에서 이런 조언도 해주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숨기라는 뜻이었다. 대놓고 최강 스탯이라는 걸 밝히지 말라는 거였다. '뭐, 어차피 잠입할 생각이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놉시스 아닌 인생을 살아가려면 계획이 있어야 했다. 일단 나는 이 몸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낡은 마차 짐칸 안에 있었다. 담요 몇 장 위에 눕혀져 있었고, 옆으로는 짐짝처럼 다른 아이들 몇 명이 잠들어 있었다. 다들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씻은 지 며칠은 된 것 같은 옷차림들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일어났구나." 앞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부석에 앉은 사람이 뒤돌아보고 있었다. 성별을 딱 구분하기 애매한 인상의 사람이었는데, 얼굴에 오래된 상흔이 몇 개 있었다. 목소리도 낮고 담담해서,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사람 특유의 무게가 느껴졌다. "여기가... 어디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아원으로 가는 중이다. 요마 습격으로 마을이 사라졌어.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 데려가는 거고." 그 사람이 짧게 대답했다. '요마.' 그 단어가 유독 귀에 걸렸다. "요마가... 뭔데요?" 나는 물었다. "몰라도 된다. 살아있는 게 다행인 거야." 그 사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고는 채찍을 가볍게 휘둘렀다. '뭔가 사연 있는 표정인데.' 나는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괜히 더 캐물었다가 분위기 싸해지는 거, 회식자리에서 상사 이혼사유 물어보는 거랑 비슷한 급의 실수였다. 마차는 계속 흔들리며 나아갔다.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은 지구와 비슷했지만, 조금 더 짙은 보랏빛이 섞여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맥의 형태도 낯설었다. 뾰족한 봉우리 몇 개는 마치 누가 일부러 깎아놓은 것처럼 날카로웠다. '진짜 다른 행성이구나.' 나는 실감이 났다. 생각해보니 내가 가진 정보는 딱 세 가지였다. 하나, 나는 신기를 품은 엘프고 능력치가 규격외라는 것. 둘, 그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것. 셋, 이 세계에는 요마라는 위협이 있다는 것. '딱 서브컬처에서 흔한 초반 설정이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웃긴데 무섭기도 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아이 하나가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귀엽네.' 나는 굳이 깨우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마차는 며칠을 더 달려서 어느 도시 근처에 도착했다. 도시의 성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살짝 감탄했다. 돌로 쌓은 성벽이 웬만한 놀이공원 성보다도 크고 웅장했다. 성벽 위에는 갑옷 입은 병사들이 규칙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고, 정문 위에는 커다란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걸려 있었다. '저거 무슨 왕국 문장 같은데.' 나는 눈여겨봤다. 앞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저런 것들부터 하나씩 외워둬야 했다. "여기가 리시엘 시." 마부가 짧게 알려줬다. '리시엘.' 나는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앞으로 살아갈 도시였다. 고아원에 도착해서는 별다른 절차가 없었다. 원장이라는 사람이 아이들 숫자만 확인하고 각자에게 방을 배정했다. 건물은 낡았지만 그럭저럭 정돈되어 있었고, 마당에는 이미 자리 잡은 아이들 몇 명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넌... 엘프구나." 원장이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엘프가 고아원에 오는 건 드문 일인데." 원장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시겠지, 신기까지 들어있으니까.'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원장은 내 얼굴을 몇 번 더 훑어보더니, 뭔가 말을 하려다 마는 눈치였다. '설마 벌써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나는 살짝 긴장했지만, 원장은 그냥 서류에 이름 하나를 더 적어넣고 방 번호를 알려줬을 뿐이었다. 일단 겉으로는 평범한 척해야 했다. 능력치를 숨기고, 조용히 살아가는 게 목표였다. 방을 나눠준 것 말고는 특별한 환영식 같은 것도 없었다. '뭐, 회사 첫 출근 때보단 낫네.' 나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목표는 목표고, 현실은 늘 계획대로 안 흘러가는 법이었다. 고아원 생활 며칠째, 나는 밖에 나가서 땔감을 구해오라는 심부름을 받았다. 같이 갈 아이가 없어서 혼자 바구니를 들고 나섰다. 숲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새소리도 들리고,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부서지는 게 그림처럼 예뻤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속으면 안 되지.'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나뭇가지를 주웠다. 바구니가 반쯤 찼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땅이 흔들렸다. 쿠구구궁- 숲 저편에서 뭔가 거대한 것이 나무를 부수며 걸어오고 있었다. '저게... 설마?'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요마 감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줄 거면 미리 좀 말해주지, 왜 이렇게 늦게 뜨는 거야.' 나는 나뭇가지를 떨어뜨렸다. 숲이 흔들릴 정도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흙이 튀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하필 첫 심부름에서 이런 걸 만나?' 숨어야 하나, 도망쳐야 하나, 뭘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능력치는 999+라지만, 정작 어떻게 써먹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게임이면 튜토리얼이라도 있었을 텐데, 여긴 그런 것도 없었다. '설명서 없는 뽑기 아이템 뽑은 기분이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그 거대한 것이 나를 발견했다. 번뜩이는 붉은 눈이 정확히 내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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