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패배를 기억하는 요람

4화

왕도에서 온 이력서는 총 세 장이었다. 이강민은 서재 책상 위에 그것들을 나란히 펼쳐놓고 하나씩 넘겨봤다. 나는 요람에 누워 그 광경을 곁눈질로 훔쳐봤는데, 두 살짜리가 서재까지 기어들어 갈 명분이 없어서 서하윤 품에 안긴 채 얌전히 구경하는 척했다. 첫 번째 이력서는 훑고 넘겼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장에서 이강민의 손이 멈췄다. "한서은. 한씨 남작가 장녀, 서른두 살. 남편과 사별. 왕립 마법원 출신, 술식학 전공. 지금은 가정교사로 활동 중···" 나는 요람 안에서 눈만 뜨고 있었다. 겉으로는 자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이력서 내용을 하나하나 기억해두고 있었다. 왕립 마법원 출신이라는 대목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전생에서 왕립 마법원은 왕국 최고의 마법 교육 기관이었고, 그곳 출신 교사를 자작가 정도의 신분이 초빙한다는 건 상당한 재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전생에 그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했다. 시험지를 세 번 접어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었다. "이 사람으로 하지." 이강민이 이력서를 흔들며 말했다. 서하윤이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경력이 화려하네요. 남작가 출신이면 급여도 만만치 않을 텐데." "돈이야 벌면 되지." 이강민은 그렇게 말하며 편지를 썼다. 초빙 절차가 시작됐고, 답장이 오는 데는 채 열흘이 걸리지 않았다. 한서은은 그로부터 닷새 뒤 마차를 타고 우리 저택에 도착했다. * 안경을 쓴 30대 여자였고, 무표정한 얼굴에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걸음걸이부터 절도가 있었다. 짐이라고는 트렁크 하나와 서류가방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가벼워 보였다. 나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기 전에 곧바로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췄다. "이서준 도련님. 마력 감응 검사를 좀 해보겠습니다." 인사도 안 하나. 성격 급하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녀는 조그만 결정석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내 손을 그 위에 얹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결정석이 미약하게 빛났다. 그 정도의 반응은 대부분의 아이들에게서도 나오는 수준이었다. 나는 일부러 반응을 약하게 조절했다. 아직 내 진짜 실력을 다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패를 다 까는 건 전생에서도 손해 보는 짓이었다. "음, 평범한 수준이군요." 한서은이 그렇게 말하며 결정석을 치우려는 순간, 나는 슬쩍 마력을 다시 흘려보냈다. 이번엔 조금 세게. 결정석이 확 밝아졌다가 곧 그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조용한 응접실에 유독 크게 울렸다. "어···" 한서은의 표정이 처음으로 바뀌었다. 무표정이 사라지고, 뭔가 계산하는 눈빛으로 변했다. 바닥에 떨어진 결정석을 주우려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방금 그 반응은··· 도련님, 다시 한번 손을 얹어보시겠어요?" 나는 다시 손을 얹었다. 이번엔 이강민과 서하윤이 목격했던 정도의 힘으로. 결정석이 아예 손 밖으로 튀어나갈 정도로 강한 빛을 냈다. 이번엔 벽까지 부딪힐 것처럼 튕겨 나갔다가, 서하윤이 재빨리 손을 뻗어 받아냈다. 한서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안경 너머로 눈동자만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이강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작님. 이건 두 살 아이의 반응이 아닙니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셔온 겁니다." "···몇 번이나 이런 걸 보이셨습니까?" "신체강화는 벌써 능숙하게 씁니다. 걷다가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 균형을 잡아요. 계단에서 굴러도 다치지 않습니다." "계단에서요?" 한서은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무적인 말투 밑에 감춰뒀던 놀라움이 잠깐 새어 나온 셈이었다. 한서은은 잠시 안경을 벗어 닦았다. 손수건으로 안경알을 문지르는 동작이 유독 느렸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뭔가를 정리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다시 쓰고 나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자작님, 저는 원래 여덟 살 미만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왕도에서도 그 나이 미만은 마력이 안정되지 않아 위험하다는 게 정설이라서요. 하지만 이 도련님이라면··· 조건을 다시 논의해야겠습니다." 협상이 시작됐다. 급여, 체류 기간, 교육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나는 그걸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원래 제시했던 급여로는 어렵겠습니다." "얼마를 더 원하십니까?" "두 배. 그리고 정기 휴가와 별도의 연구비를 보장해주셔야 합니다." "근거가 있습니까?" "이런 재능은 왕도에서도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합니다. 자작님, 이건 투자입니다. 잘 키우면 도련님이 나중에 이 영지를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강민은 잠깐 침묵했다가 짧게 웃었다. "좋습니다. 대신 결과로 보여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이런 흥정하는 광경, 전생에서도 몇 번 봤다. 사람의 태도가 이렇게 순식간에 바뀌는 건 대개 돈이나 재능 앞에서였다. 안경 너머로 나를 보는 한서은의 눈빛엔 이미 계산이 끝난 사람 특유의 확신이 서려 있었다. "제 방식은 정통적이지 않습니다." 한서은이 조건을 다 정리한 뒤 말했다. "왕립 마법원에서는 술식을 반드시 정해진 순서대로 배우게 합니다. 기초 감응, 속성 각인, 회로 형성, 순서를 어기면 위험하다고 가르치죠. 하지만 저는 그 순서가 반드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순서가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두 살짜리 입에서 나온 문장치고는 지나치게 또렷했다. 서하윤이 흠칫하며 나를 봤지만, 한서은은 오히려 웃었다. 처음 보인 웃음이었다. "방금 그 질문이 정답을 말해줬네요. 도련님은 순서보다 이해를 먼저 원하시는군요." 그녀는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펜을 쥐는 손이 익숙해 보였다. 원과 선이 얽힌 술식도였다. 마력이 흐르는 경로, 회로가 형성되는 지점, 속성이 각인되는 위치까지, 그녀는 그림을 그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마력은 물처럼 흐릅니다. 회로는 그 물길이고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회로부터 배우지만, 도련님은 이미 물길이 트여 있는 상태예요. 그러니 물길보다 물의 성질부터 배우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소름이 돋았다. 이건 전생의 그 어떤 마도사도 해주지 않은 설명이었다. 그들은 항상 순서만을 강조했고, 나는 그 순서에서 이미 낙오된 채로 시험지를 세 번 접어야 했다. 이 여자, 첫 만남부터 전생의 그 어떤 스승보다 말이 통했다. "좋습니다. 그 방식으로 가르쳐주세요." 이강민이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서명이 끝나자 한서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짐짓 사무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한서은은 그날부터 우리 저택에 상주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 첫 수업은 그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나를 정원으로 데려가 조그만 물웅덩이 앞에 앉혔다. 어젯밤 비가 와서 웅덩이 표면엔 아직 작은 나뭇잎 몇 개가 떠 있었다. "마력을 이 물웅덩이에 흘려보세요. 세게 말고, 천천히." 나는 그렇게 했다. 물웅덩이 표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뭇잎들이 그 파동을 따라 살짝 흔들렸다. 한서은이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도련님, 지금 그 마력 흐름··· 회로도 안 배웠는데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조절하시는 거죠?" 파동의 폭을 보면 안다는 건가. 세밀한 눈이었다. "보통 이 나이대 아이들은 마력을 흘리면 웅덩이 전체가 확 흔들립니다. 조절이 안 되니까요. 그런데 도련님은 지금 절반만, 그것도 균일하게 흔들었어요. 이건 회로 없이는 불가능한 수준의 제어입니다." 나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었다. 두 살짜리의 웃음이라기엔 너무 능글맞았는지, 한서은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작님께는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만, 도련님은 뭔가 숨기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 여자, 생각보다 훨씬 눈치가 빠르다. 한서은은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리다가, 다시 나를 힐끔 쳐다봤다. 그 시선이 물웅덩이보다 나를 더 오래 관찰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안경알에 반사된 오전 햇빛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안에서 어떤 계산이 굴러가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이 여자, 돈 때문에 온 건 맞는데, 진짜 궁금한 건 돈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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