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유란 제국군 진영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깃발도, 함성도 없었다.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소리가 죽어 있는 느낌이었다.
막사로 가는 길에 나는 계속 숫자를 셌다. 천막 개수, 대충 눈에 보이는 병력, 마도 병기로 보이는 철제 구조물의 배치. 습관이었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에 상대가 진짜로 얼마나 가진 놈인지 파악해두는 게 먼저였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군의 세 배는 되어 보였고, 그중 절반은 정예처럼 보였다. 승산 없는 싸움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속이 더 쓰렸다.
호위병 둘이 나를 앞뒤로 세우고 걸었다. 손목은 묶이지 않았지만, 그게 배려라기보다는 도망칠 곳이 없다는 자신감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도망칠 생각도 없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뒤에 남은 병사 1,500명은 그대로 몰살이다. 협상 하나 잘 끝내면 그들을 살릴 수 있다는 계산으로 나는 여기까지 왔다.
막사 안으로 안내받았을 때, 강신우는 지도를 보고 있었다. 금발에 백은 갑옷, 소문대로 얼굴은 반칙급으로 잘생겼다. 스무 살 초반이라고 들었는데 눈빛만은 훨씬 늙어 있었다. 그 눈이 지도에서 나에게로 옮겨오는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습관이라는 게 참 우습다. 목숨이 오가는 자리에서도 예의는 챙기게 된다.
"단월 왕국 자작가의 셋째, 이서준 장군이라 들었소."
"맞습니다."
"항복 조건을 말해보시오."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감정이 실려 있지 않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화를 내는 상대는 다룰 수 있다. 아무것도 안 느끼는 상대는 다루기 어렵다.
나는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병력 1,500명의 무장 해제와 후방 이송을 조건으로, 병사들의 생명을 보장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말하면서도 이게 통할 리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도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 각하께서 얻는 게 뭡니까? 어차피 힘으로 밀면 다 얻으실 텐데."
"명분."
짧은 대답이었다. 너무 짧아서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제국이 이 전쟁을 오래 끌 생각은 없소. 단월을 흡수한 뒤에는 명주 쪽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항복한 병력을 몰살시켰다는 소문이 돌면 다음 원정이 더 어려워지지. 항복은 받아준다."
귀가 확 뜨거워졌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그 감정은 십 초도 못 가서 취소해야 했다.
"그럼 세부 조항은···"
"단, 조건이 하나 더 있소."
말을 자르는 방식마저 계산적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뭡니까."
"성 안의 마도 병기 여덟 기, 그리고 지휘부 명단. 그걸 넘기면 협상은 성립이오."
지휘부 명단이라니. 그건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참모들을 팔라는 소리였다. 순간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삼켰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셈을 했다. 병사 1,500명과 참모 몇 명. 숫자로만 보면 이쪽이 훨씬 크다. 그런데 그 참모들 중 절반은 내가 어릴 때부터 얼굴을 본 사람들이었다. 숫자로 셈이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그건··· 들어드릴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그럼 협상은 여기서 끝이지."
너무 쉽게 나오는 말이었다. 마치 이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각하, 재고해주십시오. 지휘부 없이는 성 안의 방어선도 유지가 안 됩니다. 결국 저희 쪽 병력만 무력화되는 셈인데, 그게 각하께 무슨 이득이···"
"이득은 내가 판단하오."
강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막사 밖에서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렸다. 세 번, 짧게 짧게 길게. 나는 그게 무슨 신호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어지는 걸 봤다. 안도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런데 안도할 이유가 뭐지, 라는 의문이 든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각하, 대체 무슨···"
"항복은 받아준다고 했지, 성벽은 넘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지축이 흔들렸다. 콰앙,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진동이 발밑을 타고 올라와 무릎까지 흔들었다.
망했다. 완벽하게 망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가, 곧 다시 빠르게 돌아갔다. 협상 시간, 이동 시간, 그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일들. 계산은 늦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이 미친 자식···"
존댓말이 튀어나올 정신도 없었다. 뒤에서 강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평평했다.
"기만이 아니오. 협상은 협상이고, 전쟁은 전쟁이니까. 협상이 결렬됐으니 다시 시작한 것뿐이지."
말이 안 되는 논리였지만, 반박할 시간도 없었다. 애초에 저놈은 내 답을 듣기 전부터 병력을 움직여놨을 것이다. 협상이라는 건 그냥 시간을 버는 수단이었고, 나는 그 미끼를 물어준 셈이었다. 자책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그대로 막사를 뛰쳐나갔다. 밖은 이미 지옥이었다. 마도 병기 잔해에서 불길이 솟았고, 병사들이 무기도 못 챙기고 뛰어다녔다. 연기가 매웠다. 눈이 시렸고 숨이 막혔다. 협상하는 동안 저들은 이미 야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다시 곱씹으며 달렸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성벽 쪽으로 가는 길에 아는 얼굴들이 쓰러져 있었다.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부끄러웠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나는 무작정 성벽 쪽으로 달렸다. 도착했을 때 이미 성문은 열려 있었고, 병사들 절반이 쓰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 윤세아가 있었다.
그녀는 검을 든 채 마지막 대열을 지키고 서 있었다. 갑옷 곳곳이 그을려 있었고, 이마에서 피가 흘러 눈가를 적시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장군님!"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소리쳤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화염 마법 하나가 대열을 갈랐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튕겨 나갔다. 나는 검도 없이 그쪽으로 뛰었다. 아무 계산도 없었다. 그냥 뛰었다. 발밑에 뭐가 있는지, 어디서 화살이 날아오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숨이 얕았다. 갑옷 아래로 피가 번져 나와 흙바닥을 적셨다. 나는 그녀의 상체를 안아 올렸다. 손끝이 젖었다. 뜨거운 건지 차가운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뭐라고 입을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 눈이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더 아팠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협상이 잘못될 거라는 걸, 그럼에도 나를 보내며 웃어줬다는 걸.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살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뭐든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내 손목을 짧게 쥐었다가 힘없이 풀렸다.
그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등 뒤에서 뭔가 뜨거운 게 관통했고, 시야가 뒤집혔다. 통증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세상이 옆으로 기울었다가, 위아래가 바뀌었다가,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불타는 성벽과, 그 위로 흩날리는 백은색 갑옷의 그림자였다.
그게 끝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울음소리가 들렸다.
갓난아이의 울음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내 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시야는 흐릿했고, 손발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팔다리를 아무리 뻗어보려 해도 허공만 휘적거릴 뿐이었다. 뭔가 크고 부드러운 것이 나를 안고 있었다. 따뜻했다. 성벽 위에서 느꼈던 열기와는 다른, 사람의 체온이었다.
"아가, 우리 아가."
은발에 청안을 가진 젊은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서 뭔가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다시 태어나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었다. 시야가 다시 흐려졌고,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번에는 협상 테이블 같은 건 없을 거라는 것.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