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빨래를 삶던 솥에서 김이 훅 끼쳐 올라오는 순간, 나는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뜨거워.' 그 말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터지자마자 눈앞이 하얘지면서, 야근하다 죽었던 그날의 사무실 천장이, 스프링클러도 울지 않던 그 낡은 건물의 복도가, 서류철을 끌어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 결국 발을 헛디뎠던 순간이 통째로 밀려들어 왔다. 목덜미에 남은 화상의 감각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가죽이 익어가는 것 같은 착각에 시달렸다. 이서아. 서른둘. 게임 시나리오 작가. 그게 내 진짜 이름이었고, 나는 화재로 죽었다. 그것도 팀장이 던진 마지막 대사—"이거 오늘 밤까지 안 되면 진짜 큰일 나요"—를 유언처럼 남긴 채로.
그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솥 앞에 쭈그려 앉은 여덟 살짜리 몸으로 한참을 그렇게 얼어 있었는데, 손등에 남은 화상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한 걸 보고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보고 펴보고, 무릎을 두드려보고, 심지어 볼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는데 아프기만 할 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 이거 꿈 아니구나.' 그 결론에 도달하는 데 걸린 시간이 딱 그 정도였다.
'채미리.' 지헌 백작가 소속 시녀, 나이 여덟, 그게 지금의 나였다. 세탁실 구석에 놓인 거울 조각에 얼굴을 비춰 보니 낯익은 듯 낯선 아이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둥근 뺨과 짙은 갈색 머리를 가진 그 얼굴이 전생의 나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안심이 됐다. '적어도 얼굴 도둑맞은 건 아니네.' 거울 속 아이는 눈이 좀 크고 코가 낮았는데, 전생의 나보다 훨씬 귀엽게 생긴 것 같아서 억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하게 다행스러웠다. 죽어서 다시 태어났는데 얼굴까지 마음에 안 들면 그건 좀 너무 가혹한 일이니까.
이 세계가 어디인지 감이 잡히기까지는 좀 더 걸렸다. 저택 뒤뜰에서 다른 시녀들이 빨래를 개며 나누는 잡담을 흘려듣다가, '선현 공작가'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나는 빨래 방망이를 놓칠 뻔했다. 옆에서 시녀 하나가 "그 댁 공작님이 요새 통 안 웃으신다더라" 하고 심드렁하게 말했을 뿐인데도,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로 소름이 훅 끼쳤다.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잔혹 동화.' 내가 기획하고 시나리오를 짜고 밤새 텍스트를 다듬었던 그 게임, 출시 3주 전에 서버가 죄다 날아가서 개발팀 전체가 한강 갈 뻔했던 그 프로젝트의 제목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그 게임의 메인 히로인이자 최종 공략 대상인 악역령녀의 이름이, 선현리아였다.
나는 세탁실 바닥에 앉은 채로 한동안 웃음도 울음도 아닌 이상한 숨소리를 냈다. 옆에서 누가 봤다면 미친 애로 생각했을 텐데, 다행히 그때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쓴 대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화재로 죽은 것도 말이 안 됐고 여덟 살 시녀로 다시 태어난 것도 말이 안 됐으니, 이쯤 되면 뭐가 더 말이 안 되는지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나는 손가락을 접어가며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하나씩 세어봤는데, 세다 보니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순위표를 만들 수가 없네. 전부 1위야.'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세계에 선현리아가 존재한다면, 그 아이는 내가 설정한 대로 다섯 살에 조기 마력을 각성하고, 광학 위장과 중력 조작이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다루게 될 것이며, 그리고—여기서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여러 번의 트라우마성 사건을 겪은 뒤 결국 폭주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사람을 파괴하는 결말을 맞을 예정이었다. 나는 그 결말을 쓸 때 회의실에서 팀장한테 "이 정도는 돼야 임팩트가 있죠"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기억까지 함께 떠올랐다. 그 순간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볼 수 있었다면 아마 뒤통수를 후려쳤을 것이다.
게임에서는 그게 '엔딩 하나'였다. 플레이어가 선택을 잘못하면 나오는, 그야말로 배드 엔딩. 도트로 찍힌 폐허와 텍스트 몇 줄, 그리고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슬픈 배경음악.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게 실제로 벌어질 사람의 인생이었다. '내가 쓴 배드 엔딩이 어떤 애 인생 전체라니.' 순간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는데, 그건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실무적인 공포에 가까웠다. 마감을 어기면 팀장한테 혼나는 정도가 아니라, 어긴 대가로 누군가가 진짜로 죽거나 부서질 수도 있다는 감각. 시나리오 작가로서 나는 결말을 알고 있었고, 그 결말로 가는 분기점들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내가 그 이야기의 화면 밖 존재가 아니라, 안에 들어와 있는 엑스트라 시녀 1이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름도 없이 조연 명단 어딘가에 '시녀 1', '시녀 2'로만 표기됐을 배역이었다.
세탁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선임 시녀 조안나 언니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채미리, 넌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빨래 다 삶았으면 널어야지." 조안나 언니는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딱 게임에서 흔히 쓰이는 '엄격하지만 속은 따뜻한 선임 시녀' 템플릿처럼 보여서 나는 잠깐 웃음이 날 뻔했다. '이 언니도 내가 설정했나?' 아니, 이 캐릭터는 내 기억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는 내가 만들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뜻이었고, 그건 오히려 조금 위안이 됐다. 적어도 여기 있는 모두가 내 손끝에서 나온 부품은 아니라는 것.
나는 화들짝 일어나 방망이를 챙기며 대답 대신 고개만 꾸벅였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은 이미 다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저택이 지헌 백작가라면, 게임 초반부 설정상 선현리아가 이곳에 맡겨지는 시기가 머지않았다는 뜻이었다. 정확히는—기억을 더듬어 보니—공작이 아내를 잃고 혼혈 딸을 감당 못 해 친분 있는 백작가에 양육을 떠넘기는 장면이 프롤로그에 있었다. 프롤로그 대본을 쓸 때 나는 그 장면에 '무책임한 아버지 서사'라는 태그를 붙였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태그 하나로 정리해버렸던 그 장면이, 이제는 누군가의 실제 유년기라는 게 새삼 소름 끼쳤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가 쓴 이야기의 가장 처참한 결말을 향해 가는 여자아이가 이 저택에 들어오기 직전 시점에 서 있는 셈이었다. '작가가 캐릭터 인생에 끼어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 있었는데.' 그 생각을 진심으로 했던 밤들이 떠올랐고, 마감에 쫓겨 캐릭터를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던 그 무책임한 밤들이, 이제는 그 생각이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했다. 빨래를 너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그건 찬바람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이 기막힌 재회 예감 때문이었다. 시트 한 장을 널고, 또 한 장을 널고, 그러는 사이에도 머릿속에서는 시나리오 트리가 자동으로 펼쳐졌다. 다섯 살 각성, 열 살 첫 사건, 열넷의 화재—또 화재라니, 이쪽에도 불이 있었다—, 그리고 열아홉의 폭주.
조안나 언니는 내가 넋 놓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다시 한번 잔소리를 얹었다. "멍하니 있지 말고 서둘러. 곧 응접실 청소도 해야 하니까." 언니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대충 문지르며 저 멀리 본채 쪽을 흘겨봤는데, 그 눈빛에는 이미 뭔가 큰일이 다가온다는 걸 아는 사람의 피로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다른 말을 삼켰다. '언니, 사실 이 저택에 곧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다섯 살짜리가 올 거예요. 그리고 그 애는 언젠가 이 저택을 통째로 무너뜨릴 거고요.'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미친 애로 취급받아 쫓겨나면 시나리오를 고칠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그날 저녁, 마당 빨랫줄에 젖은 시트를 널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별도 뜨지 않은 흐린 하늘 아래, 시트가 바람에 부풀었다가 다시 축 늘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손끝의 물기를 앞치마에 닦았다. 지켜야 했다. 내가 쓴 그 아이를, 내가 쓴 그 파국으로부터. 그리고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 다짐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들게 만들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