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던전 입구는 거대한 흑색 암반이 반원형으로 뚫려 있는 형태였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도끼로 산의 배를 갈라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그 절단면이 이상하리만치 매끄러워서 자연적으로 생긴 지형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공기의 질감이 확연히 달라졌다. 바깥의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와는 달리, 안쪽은 습기가 피부에 척척 붙는 느낌이었고, 거기에 오래된 쇠붙이가 녹슬어가는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벽면에는 푸른빛을 옅게 발하는 이끼가 군데군데 붙어 있어 시야를 겨우 확보해주었는데, 그 빛깔이 묘하게 인공적이라는 인상을 줬다. 전생에 봤던 어떤 게임의 던전 조명 같기도 했고, 아니면 그냥 내가 헛것을 보는 건지도 몰랐다.
박강이 앞장서서 걸으며 손짓으로 경로를 확인했는데, 이미 몇 번 들어와본 듯 그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경력을 말해주는 셈이었다. "이 통로를 따라가면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습니다. 남작님이 발견되신 곳은 그 근처였습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벽면을 손으로 훑었는데, 차가운 금속질의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단순한 돌벽이 아니었다. 이 던전 자체가 누군가의 설계로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이라는 심증이 점점 굳어졌는데,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었다. 아직은.
"이 구조, 자연 형성물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슬쩍 던진 말에 박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탐사대의 공식 기록에도 그런 추정이 실려 있습니다. 다만 누가, 왜 만들었는지는 밝혀진 바 없습니다." 그 무뚝뚝한 대답이 오히려 신뢰를 줬다.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는 태도. 나쁘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던 중, 갑자기 발밑의 바닥이 푹 꺼졌다. 아무 전조도 없었다. 방금까지 단단하던 돌바닥이 마치 얇은 종이처럼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지만, 이미 균형을 잃은 몸은 그대로 아래로 쏠렸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감각과 함께 몸이 허공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대로 죽으면 이 세계에서의 삶도 참 짧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그다음엔 박강이 내 시체를 어떻게 수습할지 걱정하는, 지금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잡념이 이어졌다. "도련님!" 박강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지만, 그 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각성 이후 몸에 새겨진 감각을 따라 반사적으로 마력을 발밑으로 밀어냈다. 몸이 저절로 반응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나. 마력이 발바닥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며 완충 역할을 해줬고, 그 덕분에 충격이 완전히 반감되어 바닥에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었다. 무릎이 살짝 꺾이는 정도의 충격만 남았을 뿐,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 정도면 낙법 스킬 만렙인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주변을 둘러보며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떨어진 곳은 예상치 못한 공간이었다. 천장이 낮은 지하 방이었는데, 벽면 전체에 붉은빛을 발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밝아지고 어두워지는 그 빛을 보고 있자니, 이 방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물처럼 느껴졌다. 방 중앙에는 회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같은 구조물이 있었고, 그 위에 손바닥만 한 검은 결정체가 놓여 있었다. 표면은 마치 흑요석처럼 매끄럽고 반들거렸는데, 그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소용돌이치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나는 그 결정체를 보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꼈다. 이건 지도에도,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미공개 구역이었다. 남작가의 오래된 지도들, 왕국 상단에 등록된 던전 자료, 그 어디에도 이런 방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결정체를 살피는데, 문득 그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생의 기억 속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형태였는데,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답답함이 제일 짜증 나는 부분이었다. 뭔가 알 것 같은데, 그게 손끝에서 계속 미끄러지는 느낌. 하지만 이건 단순한 광물이 아니라 고밀도로 압축된 마력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밀도가, 지금까지 봐온 어떤 마력석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짙었다.
나는 손을 뻗어 결정체를 쥐었는데, 그 순간 손끝에서 시작된 뜨거운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혈관 속으로 용암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고, 나는 이를 악물며 그 충격을 견뎌냈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지만, 억지로 버텨 섰다. 이 정도 고통에 무너지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몇 초쯤인지, 몇 분쯤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뜨거운 감각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손안의 결정체는 여전히 차가웠는데, 방금 전의 그 열기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위쪽에서 로프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박강이 뛰어내려 왔다. 그의 착지는 나보다 훨씬 노련했다. 무릎을 살짝 굽힌 채 소리 없이 바닥에 발을 붙였고, 곧바로 방 안의 풍경을 훑어보며 눈을 크게 떴는데, 그 표정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낯빛을 바꾸지 않던 그 남자가 이렇게 동요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런 구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가 낮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내 손에 들린 결정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건... 남작가에서도 본 적 없는 물건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미묘한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나는 결정체를 품속에 넣으며 짧게 답했다.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챙겼어요." 최대한 가볍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 물건이 뭔지도 모르면서 일단 손에 넣고 보는 내 습성에 스스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러다 정체불명의 유물 때문에 몸에 뿔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었지만, 이미 주머니 속에 들어간 걸 다시 꺼낼 마음은 없었다. 그 말에 박강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놀라움과 의심이 뒤섞인 그 시선을, 나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시선을 피하는 순간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 걸 알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박강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솔직히 묻겠습니다. 도련님은 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그 질문에 나는 잠시 침묵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굳이 답을 미루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전생에 이세계 지식 좀 갖고 태어났다고 말하면 저 사람이 믿어줄까. 아니, 믿는다 해도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지금은 그걸 설명할 때가 아니에요. 아버지를 찾는 게 우선이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렸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박강의 시선은 조금도 거둬지지 않았다. 그 시선의 무게가 등판에 그대로 얹히는 것 같았다.
몸을 돌린 채로 방 안을 다시 둘러보려던 그때, 방 안 깊은 곳 어둠 속에서 낮고 무거운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폐가 부풀고 가라앉는 듯한, 규칙적이면서도 위압적인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걸 느끼며 천천히 몸을 돌렸는데, 어둠 속에서 붉은 두 눈동자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 그 눈동자의 크기만 봐도 짐작이 갔다. 저건 절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