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형 대신 던전에 간 차남

3화

던전 진입 준비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짐을 꾸리는 데 반나절, 병사들을 배정하는 데 한 시간, 그리고 박강이 지도를 펼쳐놓고 브리핑을 하는 데 또 반 시간이 걸렸다. 흑철 던전은 영지 북쪽 절벽 아래 위치한 지하 갱도형 지형이었고, 마물이 서식하는 깊이는 3층까지 확인되어 있었다. 박강은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으며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3층 아래로는 정찰대가 세 번 내려갔습니다. 세 번 다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 사무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롤플레이 게임에서 이런 던전은 항상 3층 밑에 진짜가 있더라'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게임이든 현실이든 밸런스는 항상 후반부에 몰빵되어 있는 법이지. 그 생각을 애써 지우고 다시 지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럼 우리는 3층까지만 갔다가 돌아온다는 거군." 내가 묻자 박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최선입니다. 도련님." 최선이라는 단어가 유독 무겁게 들렸다. 동행은 박강과 박은지, 그리고 병사 셋이었다. 병사들의 이름까지는 외우지 못했는데, 하나는 콧수염이 인상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독 체격이 좋았으며 나머지 하나는 눈빛이 매서웠다. 셋 다 갑주를 단단히 조여 매고 있었는데, 그 위로 새벽빛이 반사되어 은은하게 번쩍였다. 박은지는 짐을 정리하면서도 틈틈이 내 쪽을 살폈는데, 그 눈빛에 걱정과 기대가 뒤섞여 있는 걸 나는 모른 척했다. 못 본 척하는 게 서로에게 나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도련님, 이번엔 꼭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 그녀가 짐 꾸러미를 건네며 말하자, 나는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나 없으면 이 집 살림 누가 챙기나." 가벼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진심이 반쯤 섞여 있었다. 박은지는 그 말에 살짝 웃었지만, 웃음 끝이 어딘가 씁쓸했다. "약속이에요." 그녀가 다시 한번 못을 박듯 말했고, 나는 짐짓 여유롭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차는 절벽 아래까지 두 시간을 달렸다. 처음 삼십 분은 영지 안쪽의 잘 정비된 길이었기에 그럭저럭 편안했지만, 그 이후로는 흙길이 점점 좁아지고 나무가 울창해지면서 마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창밖 풍경은 회색빛 암반과 이끼 낀 바위로 바뀌어갔고, 하늘을 가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빛마저 점점 희미해졌다. 마차 안에서는 박강이 무기를 점검하는 소리, 병사들이 낮게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그 사이에서 딱히 할 일이 없어 창밖만 바라보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는 이런 산길을 차로 편하게 지나갔을 텐데, 지금은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엉덩이가 아파오는 걸 참아야 한다니. 신분이 귀족으로 바뀌었다고 문명의 이기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었나 보다. 던전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공기 중에 습기와 함께 옅은 쇠 냄새가 섞여드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저 비 온 뒤 젖은 흙냄새인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안에 쇳가루 같은, 혹은 오래된 피 같은 냄새가 스며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냄새는 마물의 서식지 특유의 것이라고 박강이 설명해주었다. "흑철 마물은 체내에 금속성 독을 축적합니다. 그 독이 공기 중으로 스며 나오면 이런 냄새가 납니다." 그의 사무적인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이 냄새가 진해질수록 위험하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지금 수준은 아직 낮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지만, 속으로는 '냄새로 위험을 광고하는 마물이라니, 참 친절하기도 하지' 하고 생각했다. 위험 예고제라도 있으면 다들 좀 더 살기 편해질 텐데. 마차가 던전 입구 근처 숲길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마부가 소리를 질렀다. "뭔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고, 그 외침과 동시에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밖을 살폈는데, 어둠 속에서 시커먼 형체가 도로를 가로막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몸통은 흑색 갑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표면 곳곳에 균열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며, 눈동자만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그 크기가 성인 남자 셋을 합친 것보다 컸는데, 다리 하나하나가 몸통만큼 굵어서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지면이 미세하게 울렸다. 박강이 즉시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도련님, 마차에서 내리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마물이 앞다리를 휘둘렀고, 마차의 옆면이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나무 파편과 쇳조각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중 몇 개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몸을 옆으로 던지며 파편을 피했는데, 뜨거운 통증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끼면서도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어깨를 만져보니 손끝에 따뜻하고 미끈한 감촉이 묻어났다. 피구나.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그제야 자각했다. 병사 하나가 창을 들고 마물에게 달려들었지만, 단 한 번의 앞발 휘두름에 몸이 붕 떠올라 바닥에 나뒹굴었고, 그 광경을 본 나는 이를 악물며 생각했다. '이건 던전 앞에서 벌어질 몹은 아니지 않나. 밸런스 조정이 필요한 거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치는 와중에도,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이 마물의 주의를 끌기 위해 좌우로 흩어지며 창을 내질렀지만, 마물의 갑각은 그 정도 공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며 마물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는데, 그 순간 마물이 몸을 회전시키며 꼬리를 휘둘렀고, 그 일격에 옆구리를 강타당하며 시야가 하얗게 흔들렸다. 몸이 붕 떠오르는 감각과 동시에 등이 나무 밑동에 세게 부딪혔고, 숨이 턱 막혔다. 이거, 생각보다 아프네. 전생에 그 어떤 몸싸움도 이 정도 통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실없는 비교를 하는 사이에도 갈비뼈 어딘가에서 둔탁한 통증이 계속 치솟아 올랐다. "도련님!" 박은지의 비명이 멀리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침착함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고, 순수한 공포만이 담겨 있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몰아쉬었는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손끝조차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고, 팔에 힘을 주려 해도 근육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거 진짜 위험한 상황이구나, 하는 자각이 뒤늦게 밀려왔다. 박강이 내 앞을 막아서며 마물과 검을 맞부딪혔는데, 그 충돌의 여파로 불꽃이 튀고 쇳소리가 숲 전체에 울렸다. 박강의 검이 마물의 앞다리를 몇 번이나 베어냈지만, 갑각에 얕은 흠집만 남길 뿐이었고, 그마저도 순식간에 다시 아물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저게 정상적인 재생 속도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도련님, 정신을 놓지 마십시오!" 박강이 외치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 실려 있는 다급함만은 숨길 수 없었다. 시야 한구석이 검게 물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나는 숨을 쉬려 애썼지만 폐가 제대로 부풀지 않는 느낌이었다. 갈비뼈가 몇 개는 부러진 게 틀림없었다. 병사들의 비명과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 박은지가 뭐라 외치는 목소리가 뒤섞여 귓가에서 울렸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물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걸 보았다. 그 눈동자는 마치 사냥감을 확인하듯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 이번엔 진짜로 죽는 건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툭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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