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썩어가는 영웅, 90일의 유예

4화

신전을 나선 이도현은 곧장 여관을 잡았다. 왕도 외곽의 허름한 여관이었다.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고른 곳이었다. 여관 주인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방값을 두 번이나 확인했다. 낡은 로브를 걸친 사내가 방을 잡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이도현은 아무 말 없이 동전을 세어 건넸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방은 좁고 삐걱거렸다.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들었고, 침대는 앉을 때마다 낮은 소리를 냈다. 끼익-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방 안에 홀로 앉아, 그는 신전에서 들었던 웃음소리를 곱씹었다. '역사상 최고의 회복술사가 스스로를 치유하지 못한다니.' 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있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화가 났고, 두 번째 곱씹었을 때는 부끄러웠고, 세 번째쯤 되자 그저 씁쓸했다. 그 칭호는 원래 성녀가 붙여준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성녀는 이도현의 손을 잡고 말했었다.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당신은 역사상 최고의 회복술사예요." 그때 성녀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이 자랑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전장에서 그 한마디를 되새기며 밤을 버틴 날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칭호가 오히려 그를 조롱하는 도구가 되어 있었다. 신전의 치유사들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성녀의 진심과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명성이라는 건 결국 이런 것이었나.'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은 그가 무엇을 이뤘는지보다, 지금 그가 무엇을 못 하는지를 먼저 보았다. 그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전의 치유사들에게 기댈 수 없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저주가 걸린 그날, 함께 있었던 이들을 찾아 당시의 상황을 되짚는 것이었다. 그날 전장에 있었던 이는 여섯이었다. 용사 윤서인, 검성, 현자, 성녀, 대방패, 정찰병. 그리고 이도현. 그중 왕도에 남아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그는 여관 주인에게 물었다. "검성 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여관 주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표정이 바뀌었다. 낡은 로브를 걸친 사내가 검성을 아는 사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검성 님이라면 왕도 훈련장에서 종종 뵐 수 있지요. 요즘도 신입 기사들을 가르치신다고 들었습니다. 왕성 근처 큰길을 따라가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여관 주인은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이도현이 등을 돌리자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 정보를 마음에 새겼다. 밤이 깊었다. 그는 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무 틈새로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검성이라면 그날의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다음 날, 해가 뜨기 무섭게 그는 왕도의 훈련장을 찾았다. 넓은 마당에 병사들의 기합 소리가 가득했다. 창을 든 병사들이 짝을 지어 겨루고 있었고, 그 옆에서는 신입 기사들이 목검을 들고 자세를 익히고 있었다. 한쪽에서 검을 든 여인이 신입 기사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단단한 체격을 가진 그녀가, 바로 검성이었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당을 갈랐다. 신입 기사 하나가 황급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검성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시범을 보였다. 스릉- 깨끗한 검격이었다. 십수 년을 검과 함께 살아온 이의 몸짓이었다. 이도현은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전장에서 보았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때는 갑주를 두르고 있었고, 지금은 훈련복 차림이라는 것만 달랐다. "검성 님." 이도현이 조심스레 다가가 불렀다. 검성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을 쥔 손이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이도현...? 정말 자네인가." "오랜만입니다." "살아있었군. 다행이야. 정말로." 검성의 목소리에 안도가 섞여 있었다. 주변 신입 기사들이 수군거렸다. 검성이 이토록 반가운 기색을 보이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검성은 그들을 흘겨보고는 짧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훈련은 부관에게 맡긴다. 각자 기본 자세부터 다시 점검해." 신입 기사들이 서둘러 흩어졌다. 검성은 이도현을 훈련장 한쪽 그늘로 데려갔다.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었네. 잘 지냈는가."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그런데 여쭐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검성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이도현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낯빛이 좋지 않군. 무슨 일인가." 이도현은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어 얼룩을 보여주었다. 검게 물든 살갗이 소매 아래로 삐죽 드러났다. 검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이게... 언제부터인가." "반년 전 마지막 전투 이후부터입니다. 서인 님의 팔을 치유했던 그날." 검성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도현의 팔에서 얼굴로, 다시 팔로 옮겨갔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무리한 것은 자네만이 아니었네. 하지만 자네가 쏟아부은 마력의 양은 우리 중 누구보다 많았지. 서인의 팔은 거의 뜯겨나간 상태였어. 뼈까지 보였을 정도였네. 그걸 자네가 순식간에 붙여놓았지." "기억합니다." "그때 다들 걱정했었어. 자네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고. 현자도, 성녀도, 나도 마찬가지였네."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자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 자네가 늘 웃으며 '괜찮습니다'라고만 답했으니까." 검성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 웃음을 믿었던 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르겠군." 이도현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괜찮다고 말했던 건 나였다.' 그는 속으로 되새겼다. '누구도 나를 속인 게 아니다. 내가 나를 속였을 뿐이다.' 검성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현자를 찾아가 보게. 그자라면 회복 마법의 대가에 대해 자네보다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르네. 지금은 왕립 학술원에 있다고 들었어. 항상 서고에 틀어박혀 있다고 하더군." "감사합니다." "그리고 도현." 검성이 그를 불러세웠다. "서인이 자네를 많이 그리워했네. 편지도 여러 번 보냈다고 하더군. 답장이 없어서 서운해했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자네 걱정을 하루 종일 하더군." 이도현의 가슴이 뜨끔했다. 편지는 딱 한 번, 며칠 전에 처음 받은 것이었다. 아마 그 이전의 편지들은 도원촌까지 닿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산골 마을의 우편이란 원래 그런 것이었다. "곧 찾아뵐 겁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약속이지?" 검성이 다짐을 받듯 물었다. "네." 검성은 그제야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몸조심하게.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와도 좋아. 자네에게 진 빚이 많으니까." "빚이라니, 그런 말씀은..." "그건..." 검성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됐네. 가보게. 현자가 서고에서 나오는 시간은 정오쯤이니 지금 가면 딱 맞을 걸세." +++ 검성과 헤어진 뒤, 이도현은 곧장 왕립 학술원으로 향했다. 마음이 급했다. 하나씩 흔적을 되짚을수록, 그는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른 진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무리한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몰랐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거리를 걷는 동안, 그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도원촌 시절, 아버지는 종종 밭일을 하다 말고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몸이 아프다고 말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참는 게 미덕인 줄 아는 놈들은 결국 제 몸부터 망가뜨리지." 그때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지금 와서 보니, 아버지의 말이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도의 큰길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상인들의 외침과 마차 바퀴 소리가 뒤섞였다. 이도현은 그 사이를 헤치고 걸었다. 학술원으로 가는 길은 훈련장보다 훨씬 멀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다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지쳐서 그런 걸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학술원 정문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가슴 한가운데서 낯선 통증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뻐근- 숨을 들이켜기가 힘들었다. 폐 속에서 무언가가 조여드는 듯한 감각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폐를 손으로 움켜쥐고 비트는 것 같았다. '이번엔 뭐지.' 그는 벽에 손을 짚으며 몸을 지탱했다. 손끝이 떨렸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그는 숨을 짧게 몰아쉬며 통증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다가와 묻지 않았다. 왕도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길거리에서 쓰러지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도현은 이를 악물고 통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참는 게 미덕이 아니라고 했었지.' 아버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참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몇 분이 지나자 통증은 잦아들었다. 벽을 짚었던 손을 떼자,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검은 얼룩은 어제보다 조금 더 넓어진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저 그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짙은 불안이 드리워져 있었다. 시간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학술원의 정문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첨탑과 오래된 석조 건물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안에 현자가 있었다.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도현은 마른침을 삼키고, 정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은 아까보다 더 무거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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