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썩어가는 영웅, 90일의 유예

2화

다음 날 아침, 이도현은 평소처럼 왕진 준비를 했다. 마을 외곽에 사는 김씨 노인이 며칠째 열이 내리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약재 꾸러미를 챙겼다. 해열초, 진통 연고, 상처를 봉합할 실과 바늘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손이 익숙하게 움직였다.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온 손놀림이었다. '빠진 것은 없나.' 그는 다시 한번 꾸러미 안을 들여다보았다. 없었다. 늘 그렇듯 완벽했다. 어제의 그 일—편지를 쥔 채 손에 힘이 빠졌던 순간—은 애써 지워버린 상태였다. '잠깐 저린 것뿐이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꾸러미를 등에 짊어지고 오두막을 나섰다. 아침 공기가 서늘했다. 마을로 이어지는 길에는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 풀잎마다 은빛으로 빛났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문득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전쟁터에서 그를 가르쳤던 노마법사는 늘 이렇게 말했다. '몸의 이상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은 본인이다. 하지만 가장 늦게 인정하는 것도 본인이다.' 그때는 그 말이 마법사의 자기 관리에 관한 조언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그의 발걸음이 갑자기 흐트러졌다. 휘청- 등에 진 꾸러미가 균형을 잃으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약병들이 자갈 위에 흩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유리병 하나가 깨져 진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이구, 의원님!" 마침 지나가던 촌장이 놀라 달려왔다. "괜찮습니다." 이도현이 서둘러 병을 주워담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촌장이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었다. "의원님도 나이는 못 속이시는구려. 다리에 힘이 예전 같지 않으신가 봅니다." "...그런가 봅니다." 이도현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속으로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이 탓이라고?' 그는 자신의 나이를 떠올렸다. 아직 서른 줄에도 미치지 않은 나이였다. 전투 중에도 하루 종일 마법을 쓰고도 지치지 않던 몸이었다. 한때는 하루 밤낮을 꼬박 싸우고도 다음 날 또 검을 쥘 수 있었다. 그런 몸이 이제는 약병 하나 짊어지고 걷다가 무너지고 있었다. 촌장은 이미 그 일을 잊은 듯,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지난 장날에 팔린 곡식값이 어땠는지, 이웃 마을에 도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어떤지. 마을 사람들 누구도 이도현의 얼굴에 스친 그 짧은 그림자를 읽어내지 못했다. 그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지나가던 아낙 하나가 인사를 건넸다. "의원님, 오늘도 김씨 어르신 댁 가시나요?" 이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얼마나 얇은지, 그 자신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 김씨 노인의 집에 도착해서도 이도현은 평소처럼 진료를 마쳤다. 노인의 이마는 여전히 뜨거웠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그는 노인의 손목을 짚어 맥을 살폈다. '열이 사흘째 떨어지지 않는다. 몸속의 사기(邪氣)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판단을 내리고 곧바로 손을 움직였다. 열을 다스리는 마법을 쓰는 동안,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아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손끝에서 마력이 흘러나가는 감각이 평소보다 둔했다. 마치 팔 전체에 무언가가 감겨 있는 듯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어 보였다. 노인의 이마에 손을 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붉었던 안색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숨소리도 한결 편해졌다. "고맙습니다, 의원님." 김씨 노인의 아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녀는 이도현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거칠고 마른 손이었다. "별말씀을요." 이도현이 답했다. 그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의원님 아니었으면 이 늙은이가 벌써..." 아내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괜찮아지실 겁니다. 며칠 더 지켜봐야겠지만,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남은 약재 몇 가지를 방 한쪽에 내려놓았다. 집을 나서며, 그는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웃어 보이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 그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추고 오른팔을 주물렀다. 감각이 이상했다. 저린 것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부위가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감이었다. '이건 단순한 피로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 밤이 깊었다. 이도현은 오두막으로 돌아와 홀로 앉았다. 촛불 하나만 켜놓은 방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그는 더는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 낮의 실수는 결코 나이 탓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진단하기로 결심했다. 먼저 오른팔의 소매를 걷었다. 검푸른 얼룩은 어제보다 조금 더 넓어져 있었다. 손끝으로 짚어보니 그 부위는 감각이 거의 없었다. 바늘로 찔러보아도 아무 느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소매를 걷어 올려 팔뚝 전체를 확인했다. 어깨 근처까지 얼룩의 경계가 희미하게 이어져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확실히 번져 있었다. '이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꺼냈다. 낡은 손거울이었지만,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기엔 충분했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쪽 눈을 가렸다. 왼쪽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두웠다. 촛불이 켜져 있는 방인데도, 왼쪽 눈에는 그저 짙은 어둠만이 보였다.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손이 거울을 쥔 채로 얼어붙었다. 완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촛불을 눈앞으로 가져가 보았다. 빛의 밝기가 아무리 강해져도 왼쪽 눈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른쪽 눈으로는 선명하게 보이는 불꽃이, 왼쪽 눈에는 그저 무(無)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오른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언제 왼쪽 눈의 시야가 사라졌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스승님이었다면 뭐라 하셨을까.' 그런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노마법사는 늘 몸의 신호를 놓치지 말라 가르쳤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가장 충실히 배운 제자가, 정작 자신의 몸에서 벌어진 가장 큰 변화를 놓쳐버렸다. 그는 거울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죽어가고 있다.' 그 말이 처음으로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지금까지는 애써 외면할 수 있었다. 저린 손, 흐릿한 시야, 무거운 다리. 그 모든 것을 그저 피로나 노화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시야 앞에서는, 더 이상 그런 변명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촛불이 점점 짧아지고, 방 안의 어둠이 조금씩 깊어졌다. 심지가 타들어가며 내는 작은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그는 다시 소매를 걷어 팔을 바라보았다. 검푸른 얼룩. 감각 없는 오른팔. 어둠뿐인 왼쪽 눈. 그리고 낮에 넘어질 뻔했던 다리까지. '몸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그것도 빠르게.' 그는 냉정하게 정리해보려 했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결심했다. 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왕도. 그곳에는 왕실 신전이 있었고, 대륙 최고의 치유사들이 있었다. 그리고—그의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왔다—윤서인이 있었다. 그는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편지를 다시 꺼냈다. 손에 힘이 빠졌던 그 편지였다. 촛불 아래 펼쳐보니 익숙한 필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리움을 담은, 그러나 애써 절제된 문장들이었다. '가야 한다.' 그는 그렇게 결심했다. 편지에 담긴 그리움을 핑계로,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기 위해. 그는 편지를 다시 접어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방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짐가방을 꺼내 열어보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가방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내일이면 이 가방에 짐을 꾸려야 했다. 오두막을 떠나야 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김씨 노인에게, 그동안 도움을 청했던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날 밤, 이도현은 처음으로 자신의 오두막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촛불이 마침내 꺼졌다. 방 안은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이도현은 오른쪽 눈으로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잠깐, 확인했다. 착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어둠이,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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