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썩어가는 영웅, 90일의 유예

1화

해가 뜨기 무섭게 이도현은 약초 바구니를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도원촌의 아침은 늘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닭 울음소리와 우물가에서 물 긷는 아낙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이는,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그는 어젯밤 널어둔 당귀 뿌리를 살폈다. 이슬을 맞아 촉촉해진 뿌리는 손끝에서 미끄러웠다. '오늘은 좀 더 말려야겠군.' 그는 그렇게 판단하며 바구니를 화로 옆에 내려놓았다. 그는 마당 한켠에 놓인 화로에 불을 지폈다. 마른 나뭇가지에 불씨가 옮겨붙는 소리가 타닥, 타닥 울렸다.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요즘 부쩍 손이 저리는군.' 그는 그렇게 여기며 화로에 약탕기를 올렸다. 의원이라 부르기엔 초라한 오두막이었다. 방 한 칸에 진료대 하나, 약장 하나가 전부였다. 벽에는 오래된 약초 그림 몇 장이 붙어 있었고, 그 밑으로 손수 만든 침통과 절구가 놓여 있었다. 화려할 것 하나 없는 살림이었다. 그러나 도원촌 사람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병이 나면 누구나 이도현을 찾았고, 그는 언제나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의원님, 계세요?" 문밖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이도현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노파는 허리를 짚으며 들어왔다. 걸음걸음마다 얕은 숨을 몰아쉬는 것이, 삼 년 전부터 앓아온 관절통이 오늘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이도현은 진료대 앞에 앉으라 권한 뒤, 그녀의 손목을 잡고 눈을 감았다. 손끝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따뜻한 기운이 노파의 관절로 스며들었다. 노파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번졌다. 굽어 있던 무릎이 조금씩 펴지는 것을 그녀 스스로도 느낀 듯, 손으로 무릎을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오늘도 신세를 지네요." 노파가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이도현도 웃었다. "의원님 아니었으면 나는 벌써 논일도 못 나갔을 게요." "과찬이십니다. 몸이 원래 이겨낼 힘이 있었던 거지요." 그러나 그 웃음 뒤편에서, 그의 오른팔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치유 마법을 쓸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제는 무시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이 말은 벌써 수십 번째 반복하는 다짐이었다. 노파가 돌아간 뒤, 이도현은 진료대에 걸터앉아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소매를 걷어 올리자 팔뚝 안쪽에 검푸른 얼룩이 보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로, 마치 멍이 든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번져가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얼룩의 경계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였다. 지금은 그보다 반 마디쯤 더 넓어져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그 부위를 눌러보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감각이 조금 무뎌져 있을 뿐이었다. 그 무뎌짐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반년 전, 세계를 구원했던 전쟁이 끝난 뒤부터였다. 그때 그는 동료들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하루도 쉬지 않고 마법을 썼다. 마지막 결전에서 용사 윤서인의 오른팔이 마수의 이빨에 짓뭉개졌을 때, 이도현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마력을 쏟아부어 그 팔을 되살렸다. 그 순간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했다. 서인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피, 동료들의 비명, 그리고 자신조차 통제하지 못했던 마력의 폭주. 이도현은 그때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살려야 한다. 대가가 무엇이든.' 그 순간 그는 대가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의 몸은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스승격이었던 대현자의 말이 떠올랐다. '회복술은 대가를 요구하는 마법이다. 무엇을 치유하든, 그 대가는 반드시 술사의 몸으로 돌아온다.' 젊었을 적 배웠던 그 가르침을, 그는 애써 잊으려 했었다. 대현자는 그 말을 할 때마다 늘 같은 표정을 지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경고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팔뚝의 얼룩은 그 가르침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소매를 다시 내리며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접었다. 밖에서 또 다른 환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날 오후에는 아이 하나가 넘어져 무릎이 까진 채로 들어왔다. 아이의 어미가 등을 밀며 들여보낸 것이었다. 이도현은 무릎에 약초를 짓이겨 붙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굳이 마법을 쓸 필요는 없는 상처였다. 그런 판단조차 요즘은 습관처럼 신중해졌다. '작은 상처에까지 힘을 쓸 이유는 없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사탕 대신 건네받은 마른 대추를 씹으며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이도현은 잠시 미소 지었다. 이런 평범한 하루가,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 오후가 되자 우편을 나르는 소년이 마을에 들어섰다. 왕도에서 오는 파발이 도원촌까지 닿는 일은 드물었다. 마을 사람들 몇이 신기한 듯 소년을 쳐다보았지만, 소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장 이도현의 오두막으로 뛰어왔다. "의원님, 편지요!" 소년이 숨을 몰아쉬며 봉투를 내밀었다. "이 먼 길을 왔구나. 물이라도 마시고 가라." 이도현이 그를 향해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 마을까지 가야 해서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도현은 약초를 손질하던 손을 멈추고 편지를 받았다. 봉투에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왕실의 인장이었다. '설마.'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봉투를 열자 단정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아는 필체였다. 전투 중에도 흔들림 없던, 용사 윤서인의 글씨였다. 서인은 늘 그랬다. 검을 쥔 손으로도 흐트러짐 없는 글자를 써내는 사람이었다. [도현 님께. 오랜만에 소식을 전합니다. 그날 이후로 벌써 반년이 지났군요. 왕도는 평화롭습니다만, 저는 종종 그때를 떠올립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지요. 시간이 나신다면, 한 번쯤 왕도로 와 주시겠어요. 저와 동료들 모두 당신을 뵙고 싶어합니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이도현의 눈가가 살짝 젖어들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그리워한다는 감각.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스스로 도원촌으로 숨어들었다. 그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그것이 두려웠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편지를 쥔 오른손이 갑자기 힘을 잃었다. 툭- 편지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도현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마치 그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손등에 힘을 주어보아도, 손목을 움직여보려 해도, 그 어떤 명령도 전달되지 않았다. '이건...' 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몇 초가 지나자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손끝부터 저릿한 느낌이 올라오더니, 이내 손가락 마디마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의 공백이, 이도현의 가슴에 얼음 같은 두려움을 심어놓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그는 자신의 손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팔뚝의 얼룩이 소매 속에서 은근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저 기분일 뿐이라고,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떨어진 편지를 주워 다시 소중히 접었다. 손끝이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접힌 편지를 품속에 넣으며,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평화로운 도원촌의 풍경이었다. 아낙들은 여전히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도현의 마음속에는 처음으로 선명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서인이 나를 기억하는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끝에는,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다시 팔뚝의 얼룩을 확인했다. 어둑해지는 방 안에서도 그 검푸른 흔적은 또렷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그를 갉아먹고 있는 듯한 모양이었다. '왕도로 가야 할까.' 그는 속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그 물음의 끝에는, 대현자의 마지막 경고가 다시 떠올랐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마법은 술사를 집어삼킨다.'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이도현의 손끝이 다시 한번 가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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