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오태산이 세 번째 그림자를 밀어냈다.
칼날이 허공을 갈랐고, 그림자는 뒤로 튕겨 나가 나무둥치에 등을 부딫혔다. 신음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오태산의 숨이 거칠어져 있었다.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소매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검을 쥔 손목을 타고 흘러내려 검자루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리가 떨렸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가 다시 펴졌다. 그는 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손끝의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장무열의 칼끝이 이현우의 목 앞에서 멈췄다.
정확히 한 치의 거리였다. 차가운 쇳내가 코끝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달빛이 그 칼날 위로 미끄러지듯 흘렀다. 서늘한 빛이었다.
이현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면 그대로 끝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목덜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었다. 크게 들이켰다가는 그 움직임만으로도 칼끝이 살갗을 파고들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지."
장무열이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듯 담담한 어조였다.
"열여섯 해 동안 바보 노릇을 한 이유가 뭐지."
이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숲의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그 침묵을 채웠다. 멀리서 다른 그림자들과 오태산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대답할 필요 없다."
장무열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끝날 목숨이니까."
그 말에는 조롱도 없었다. 동정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것이 더 서늘했다.
그 순간, 오태산이 몸을 던졌다.
"안 된다!"
그가 소리쳤다. 목이 터질 듯한 외침이었다. 검을 휘두르며 장무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상처 입은 몸으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였다.
장무열은 칼끝을 이현우에게서 거두지 않은 채 다른 손으로 오태산의 검을 막았다.
캉—
두 개의 쇠가 부딪히며 불꽃이 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불꽃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오태산은 밀려나면서도 다시 검을 들었다. 발끝이 땅을 파고들며 겨우 균형을 잡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도련님을 건드리게 두지 않는다!"
"당신 혼자서 나까지 막을 수는 없다."
장무열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이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태산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이 더 굴욕적이었다.
오태산의 숨이 가빠졌다. 이미 세 명을 상대하며 체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팔이 무거웠다. 검을 든 손이 저려왔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련님."
그가 이현우를 향해 소리쳤다. 목소리에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이 습격은 도적의 짓이 아닙니다. 원성주 최광호가 시켰을 겁니다!"
이현우가 눈을 크게 떴다.
"흑하성은…"
숨이 잠시 멎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조각들이 빠르게 맞춰지고 있었다.
오태산이 검을 휘두르며 말을 이었다. 숨을 헐떡이면서도 계속 말했다. 한 마디씩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목소리였다.
"흑하성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재정관 박정헌이라는 사람이 겨우겨우 성을 지켜왔습니다. 원성주는 세금만 걷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나를…"
이현우가 되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만은 또렷했다.
"모릅니다. 하지만 이 습격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오태산이 다시 검을 밀어붙였다. 팔이 후들거렸지만 검끝은 흔들리지 않았다.
장무열이 그 말을 들으며 미간을 좁혔다.
"많이 아는군."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미묘한 균열이 느껴졌다.
"당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는 모르지만, 이건 정치다."
오태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검을 겨눈 채로 그는 장무열을 똑바로 응시했다.
"단순한 강도질이 아니야."
장무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에 작은 흔들림이 스쳤다. 아주 짧은, 눈치채기 힘들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오태산이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오랫동안 사람을 상대해온 눈이었다. 그는 그 순간을 읽어냈다.
"당신도 뭔가 알고 있군."
"…쓸데없는 말이 많다."
장무열이 다시 이현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대화를 더 끌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의 칼끝이 다시 이현우의 목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가까웠다. 살갗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였다.
그때였다.
숲 전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바람도, 벌레 소리도,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도 일순간 사라졌다. 마치 세상이 숨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오태산을 상대하던 두 명의 그림자도 멈췄다.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무언가를 느낀 표정이었다.
장무열도 잠시 멈췄다. 그의 시선이 이현우의 얼굴에서 잠시 벗어나 주변을 훑었다.
웅—
낮은 울림이 다시 귓속을 파고들었다. 뼈까지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소리라기보다는 감각에 더 가까웠다.
이현우의 손끝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따뜻함이었다.
차가움이 아니라,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그 어떤 감각과도 달랐다.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천천히 번져오는, 낯설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온기였다.
손바닥 위로 희미한 문양이 떠올랐다.
점.
선.
빛은 처음엔 미약했다. 하지만 곧 선명해졌다.
오태산이 그 광경을 보았다. 눈이 커졌다. 검을 든 손이 잠시 멈췄다.
"도련님, 그것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이현우의 손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현우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있었다.
문양은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점. 선. 물결.
마지막으로 탑이 떠올랐다.
네 개의 문양이 손바닥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은은한 빛이 그의 손을 감싸며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알 수 있었다.
신앙값이 채워지고 있었다.
오태산이 그를 위해 몸을 던졌던 그 순간부터.
진심으로 도련님을 지키려 했던 그 마음이, 무언가를 불러온 것이었다. 계산이나 의무가 아니었다. 순수한 헌신이었고, 그것이 이 힘을 움직이고 있었다.
장무열은 그 빛을 보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처음으로 그의 발걸음에 확신이 아닌 경계가 실렸다.
"뭐지, 저건."
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낮은 경계심이 배어 있었다.
이현우는 손끝을 천천히 들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팔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신앙값이 다시 3이 되어 있었다.
그의 입가에 얕은 웃음이 걸렸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웃음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0이었던 숫자가 다시 채워졌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에는 무엇보다 확실한 무기였다.
"이제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군."
장무열의 칼끝이 다시 그를 겨눴다. 손목에 힘이 들어간 것이 보였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같다."
그가 잘라 말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두고 보지."
이현우가 대답했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을 그렸다. 천천히, 하지만 정확한 궤적이었다.
작은 은빛 칼날이 손끝에서 소환되었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였다.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났다. 표면이 매끄러웠고, 그 위로 흐르는 빛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장무열의 눈이 커졌다. 처음 보는 것에 대한 순수한 놀람이 그의 얼굴에 잠시 드러났다.
"그게 뭐냐."
"알 필요 없다."
이현우가 손을 뻗었다. 손목을 가볍게 튕기는 동작이었다.
소이비도가 허공을 날아 장무열의 어깨를 스쳤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얕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옷 위로 붉은 자국이 번졌다.
장무열이 뒤로 물러났다. 어깨를 만지며 상처를 확인했다. 얕은 상처였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얕지 않았다.
"…이런 게 가능한 놈이었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오태산이 그 틈을 타 다른 그림자를 밀쳐냈다. 숨이 거칠었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도련님!"
그가 소리쳤다.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압니다."
이현우가 대답했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조금 전까지의 두려움은 어느새 다른 무언가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싸울 겁니다."
장무열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어깨의 상처를 무시한 채, 목소리에 긴장이 실렸다.
"전부 나서라! 이 아이가 진짜다!"
그 외침이 숲 전체로 퍼졌다.
숲의 사방에서 남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몸을 낮췄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미세한 소음들이 사방에서 겹쳐졌다. 그들이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달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아홉 개의 살기가 두 사람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이현우는 손끝의 은빛 칼날을 응시했다. 그 빛이 유난히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신앙값은 다시 3.
소모하면 다시 0이 될 것이다. 그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방금 소이비도 하나를 날렸을 뿐인데도 손바닥 안의 온기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 더 얻을 기회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오태산의 헌신이 우연히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것이 다시 일어날지, 언제 일어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가진 것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아홉 개의 그림자를 상대로, 오태산과 단둘이서.
숲 전체가 전장이 되려는 순간이었다.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더 이상 평화롭지 않았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감추기 위한 배경처럼 들릴 뿐이었다.
이현우는 숨을 골랐다. 오태산도 그의 곁에서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장무열의 부하들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