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바보 흉내, 오늘부로 끝낸다

1화

바람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현우는 눈을 떴다. 어둠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천장의 나무 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 벽에 걸린 낡은 도롱이. 방 한구석에 쌓인 짚단. 16년을 봐온 풍경이었다. 익숙한 냄새였다. 흙바닥. 곰팡이. 오래된 볏짚. 그런데 지금 코끝에 닿은 것은 다른 냄새였다. 쇠 냄새. 그리고 그 밑에 숨은, 설명할 수 없는 냄새. 이현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뼈마디가 뻐근했다. 낮에 산에서 나무를 해온 탓이었다. 오태산의 지시였다. 나무를 백 단 해오라고 했고, 그는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실제로는 아흔 단밖에 못 했지만 오태산은 그것도 웃으며 넘겨주었다. 열여섯 해. 그 세월을 그는 바보로 살았다. 웃어야 할 때 웃었다. 흘려야 할 때 흘렸다. 말을 더듬었고, 침을 흘렸고,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 앞에서 늘 눈을 피했다. 동네 아이들이 돌을 던져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헤벌쭉 웃으며 그 돌을 주워 아이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재미없다는 듯 흩어졌다. 그것이 이현우가 터득한 첫 번째 생존법이었다.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 남은 돈을 손에 쥐고 있으면 어른들이 슬쩍 빼앗아 갔다. 그는 손을 뻗어 뺏기지 않으려는 시늉만 하다가 곧 포기했다. 분한 표정도, 억울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냥 조금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가 다시 헤실헤실 웃었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첫날부터 그는 그것을 알았다. 아무 힘도, 아무 배경도 없는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위장이었다. 똑똑하다는 것이 알려지는 순간, 이 세계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목숨을 위협하는 표식이 된다는 것을.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다섯 살배기 몸으로 눈을 떴을 때, 이현우는 그 사실을 직감으로 깨달았다. 방 한가운데, 허공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웅— 낮은 진동이 방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벽에 걸린 도롱이가 살짝 흔들렸다. 짚단 위에 쌓인 먼지가 파르르 떨렸다. 이현우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맥박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점. 선. 물결. 탑. 네 개의 문양이 허공에 새겨졌다. 흐릿했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허공에 글씨를 새기는 것 같았다. 문양의 윤곽선이 옅은 청색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빛은 방 안의 어둠을 조금도 밀어내지 못했다. 오직 문양의 테두리만을 밝혔다. 그 밑으로 글자가 흘렀다. [신앙값 교환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이현우는 숨을 멈췄다. 16년을 기다려온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언제 올지 모른 채 그저 살아냈던 시간이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혹시 오늘일까 생각했던 밤이 몇 밤이었는지 그는 세어보지 않았다. 세어봤다면 그 숫자에 절망했을 것이다. 현대의 기억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었다. 서울의 지하철, 형광등 불빛, 늦은 밤의 편의점. 편의점 유리문에 붙은 김밥 할인 스티커. 지하철 안내 방송의 그 특유의 억양. 형광등이 깜빡일 때 나는 미세한 잡음. 그런 것들이 아직도 선명했다.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그 기억들과 이 세계의 하루하루가 겹쳐 흐르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이 순간을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 세계가 그런 시스템 같은 것 없이 그냥 흙과 나무와 배고픔으로만 이루어진 곳일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밤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문양이 눈앞에 있었다. [현재 보유 신앙값: 3] 숫자는 초라했다. 그러나 없는 것과는 달랐다. 이현우는 그 숫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3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크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16년의 시간이 압축되어 그 한 자리 숫자 안에 담긴 것 같았다. 그는 손을 뻗어 문양을 만지려 했다. 손끝이 허공을 그대로 통과했다. 감각은 없었다. 그러나 존재는 분명했다. 문양은 그의 손이 지나가도 흩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미세하게 진동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이현우는 손을 거두고 다시 문양을 바라보았다. 탑의 문양이 유독 눈에 밟혔다. 다른 세 문양보다 선이 복잡했다. 밖에서 소리가 났다. 이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발소리는 아니었다. 바람에 문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문이 흔들리는 리듬이 어긋나 있었다. 마치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태로 바람을 맞고 있는 것처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손끝이 아직 차가웠다. 문양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오태산의 방은 옆이었다. 16년 동안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밤이면 코 고는 소리가 벽을 넘어왔고, 새벽이면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들은 이현우에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와 같았다. 오태산이 코를 고는 소리가 잦아들면 새벽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고, 장작 패는 소리가 들리면 아침이 왔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이현우는 그 침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태산은 늘 시끄러운 사람이었다. 잠들어도 시끄러웠고, 깨어 있어도 시끄러웠다. 이렇게 완전한 침묵은 처음이었다. 이현우는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다시 두드렸다. 조금 더 세게. 역시 대답은 없었다. 문을 열었다. 방은 비어 있었다. 이불은 흐트러진 채였다. 마치 급히 자리를 뜬 것처럼. 이불의 한쪽 끝이 방바닥에 늘어져 있었고, 베개는 원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누군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갑자기 끌려 나간 흔적처럼 보였다. 탁자 위에 놓인 낡은 검이 그대로였다. 오태산이 어디를 가든 늘 챙기던 물건이었다. 그 검은 오태산의 분신과도 같았다. 밭을 갈 때도, 장에 나갈 때도, 심지어 뒷간에 갈 때도 그는 그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손잡이는 오랜 손길에 반질반질했고, 칼집은 여러 번 덧대어 기운 흔적이 있었다. 검을 두고 갔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현우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무언가 더 있을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옷가지는 그대로였다. 오태산이 아끼는 낡은 담뱃대도 원래 자리에 있었다. 다만 방문 옆, 흙바닥에 희미하게 젖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물인지 다른 무엇인지 어둠 속에서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현우는 마당으로 나갔다. 달빛이 흙마당을 비추고 있었다.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렸다가 다시 물러났다. 그 잠깐의 어둠과 밝음의 교차 속에서 마당의 흙바닥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익숙한 오태산의 발자국. 그리고 그 옆에, 낯선 발자국 하나. 작고, 가벼운. 그러나 깊게 찍힌. 이현우는 무릎을 굽히고 그 발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발자국의 깊이가 이상했다. 작은 발이라면 그렇게 깊이 파고들 수 없었다. 흙이 단단히 다져진 마당인데도 발자국의 테두리가 뚜렷하게 눌려 있었다. 마치 무거운 것을 지고 있었던 사람의 발자국처럼. 이현우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숨소리를 낮췄다. 귀를 기울였다. 마당은 조용했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 시각쯤 풀벌레들이 시끄럽게 울어야 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다. 먼 산등성이 쪽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소리는 한 번뿐이었고, 다시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였을 수도 있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였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그 소리가 났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다만 코끝에 닿는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쇠 냄새. 그리고 그 밑에 숨은, 피 냄새였다. 이현우는 그 냄새를 알고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몇 번이나 맡아본 냄새였다. 사냥한 짐승의 피 냄새와는 달랐다. 이것은 더 진하고, 더 무거웠다. 마치 오랜 시간 쌓인 것처럼. 그는 다시 방 안의 문양을 떠올렸다. 신앙값 3. 그 숫자가 지금 이 순간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필 오늘, 시스템이 활성화된 이 밤에, 오태산이 사라졌다는 것이 우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은 믿는 만큼만 본다. 하지만 지금 이현우가 본 것은, 믿고 싶지 않은 흔적이었다. 그는 다시 발자국을 살폈다. 오태산의 발자국은 마당을 가로질러 숲으로 이어지는 길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낯선 발자국은 오태산의 발자국과 나란히, 때로는 겹쳐서 이어졌다. 마치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간 것처럼. 혹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끌고 간 것처럼. 이현우는 마당 끝, 숲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흙이 서걱거렸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옷깃 사이로 스며드는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그는 그 냉기를 느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그 길 끝에서, 무언가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현우는 숲 초입에 다다르기 전, 잠시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았다. 방 안의 문양은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지, 창문 너머로 옅은 청색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이 그의 등을 잠시 비췄다가, 그가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서서히 사라졌다. 숲은 어둠 그 자체였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은 거의 없었다. 이현우는 손을 뻗어 어둠을 가늠하려 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가운 밤공기뿐이었다. 발자국은 숲 입구에서 끊겼다. 흙길이 아니라 낙엽이 쌓인 바닥이라 더 이상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이현우는 무릎을 굽히고 낙엽을 조심스럽게 헤쳤다. 그 아래로 흙이 파헤쳐진 흔적이 보였다. 누군가 급하게 움직인 자국이었다. 그는 다시 코를 킁킁거렸다. 피 냄새가 더 짙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냄새 사이로, 처음 맡아보는 낯선 냄새 하나가 섞여 있었다. 달지도, 쓰지도 않은, 설명할 수 없는 냄새였다. 숲 안쪽에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우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소리의 방향이 일정했다. 마치 무언가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어렴풋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사람인지, 짐승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현우의 손끝은 이미 완전히 차가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숲 저편에서 오태산의 목소리와 비슷한, 그러나 어딘가 뒤틀린 소리가 짧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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