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바보 흉내, 오늘부로 끝낸다

2화

숲길은 어두웠다. 이현우는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발밑에서 마른 잎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흘러들었다. 바람은 없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몸을 돌렸다. 오태산이었다. 거대한 체구, 어깨에 걸친 낡은 겉옷, 손에는 등불이 들려 있었다. 등불의 불빛이 그의 굵은 눈썹과 턱선을 위로 비추고 있었다. "도련님." 오태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어찌 이 밤에 여기 계십니까." 이현우는 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었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방이 비어 있었습니다." "급한 전갈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태산은 등불을 낮춰 이현우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에 무언가가 스쳤다. 늘 보아온 멍한 눈빛이 아니었다. 눈동자의 초점이 또렷했다. 흐릿함이 없었다. "도련님." 오태산이 다시 불렀다. "눈빛이... 평소와 다르십니다." 이현우는 잠시 침묵했다. 16년을 감춰온 것을 여기서 드러내야 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태산의 눈은 이미 무언가를 알아챈 것 같았다. 저 눈빛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었다. 확신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태산." 이현우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무슨 전갈이었습니까." 오태산은 잠시 이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등불을 내려놓았다. 땅바닥에 놓인 등불의 불빛이 두 사람의 발치를 붉게 물들였다. "황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황실에서요." "흑하성의 성주 자리가... 도련님께 넘어왔습니다." 이현우는 멈춰 섰다. 이 세계에 온 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흑하성. 어렴풋이 들은 적은 있었다. 변방의, 버려진 봉지라고. 가문의 어른들이 식사 자리에서 나누던 말 중에, 지도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땅이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게요." "예." 오태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일 아침, 떠나야 합니다." 이현우는 오태산의 얼굴을 살폈다.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얽혀 있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람의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 표정을 하고 계십니까." 오태산은 잠시 답하지 않았다. 등불의 심지가 타들어가는 소리만 조그맣게 들렸다. 그러다가 낮게 말했다. "흑하성으로 가는 길이 순탄치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가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이현우는 묻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삼켰다. 그날 밤, 이현우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흑하성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버려진 봉지. 변방. 순탄치 않을 길.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혔다. 창밖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가 끊어졌다. 다음 날 새벽, 두 사람은 짐을 꾸려 길을 나섰다. 오태산이 앞서 걸었고, 이현우가 그 뒤를 따랐다. 산길은 좁고 가팔랐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쳤고, 발밑의 돌이 자꾸 미끄러졌다. 등에 진 짐이 어깨를 짓눌렀다. 숨이 가빠질 때마다 이현우는 걸음을 잠시 멈추고 숨을 골랐다. 오태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걸음의 속도를 조금씩 늦춰주었다. 그 배려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해주었다. 산 아래로 안개가 깔려 있었다. 바위 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정오 무렵, 두 사람은 계곡을 건너기 위해 잠시 멈췄다. 계곡물은 맑고 차가웠다. 물살이 돌 위를 넘어가며 하얗게 부서졌다. 오태산이 물통에 물을 채우는 동안, 이현우는 나무 그늘에 앉아 손을 들었다. 손등에 땀이 배어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현재 보유 신앙값: 3] 문양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점. 선. 물결. 탑. [신앙값 3을 소모하여 소이비도(小異飛刀)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이현우는 손끝에 힘을 모았다.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험해야 했다. 어젯밤부터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이었다. 이 힘이 진짜인가. 웅— 허공에서 작은 빛이 맺혔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은빛 칼날이었다. 칼날의 표면에는 아까 보았던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점, 선, 물결, 탑. 칼날은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그가 마음속으로 방향을 정하자 그대로 날아갔다. 십 보 앞에 서 있던 마른 나무 둥치에 정확히 박혔다. 나무껍질이 갈라지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이현우는 숨을 멈췄다. 손끝이 떨렸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다른 종류의 흥분이었다. 16년간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가, 처음으로 무언가를 손에 쥔 순간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이토록 선명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도련님." 오태산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현우는 재빨리 손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태산이 나무에 박힌 칼날을 보았다. 그리고 이현우를 보았다. 그의 시선이 나무와 이현우의 손 사이를 오갔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계곡의 물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웠다. "언제부터입니까." 오태산이 물었다. 목소리에는 놀람보다 다른 무언가가 더 짙게 묻어 있었다. "어젯밤부텁니다." "그럼 그동안은..." "위장이었습니다." 오태산의 얼굴이 서서히 변했다. 놀람이 아니었다. 어딘가 오래 기다려온 표정 같았다. 마치 십수 년 동안 품고 있던 의심이 마침내 확인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알고 있었던 겁니까." 이현우가 물었다. "짐작만 했습니다." 오태산이 답했다. "16년 동안 도련님의 눈은 단 한 번도 진짜로 흐려진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도련님을 안은 첫날부터 지켜본 사람입니다." 오태산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멍한 눈빛 뒤에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눈이었습니다. 그건 흉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6년간 자신이 완벽하게 감췄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단 한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다른 이들도 알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저만 짐작했을 뿐입니다." 오태산은 잠시 나무에 박힌 칼날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짐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태산이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합니다. 해가 지기 전에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이현우는 나무로 다가가 칼날을 뽑았다. 손에 쥐자, 칼날은 스르르 빛이 되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나무에 박혔던 흔적뿐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나섰다. 산은 점점 깊어졌고, 그늘은 점점 짙어졌다. 나무들의 키가 높아질수록 하늘이 좁아졌다. 길은 갈수록 인적이 드물어졌다. 걷는 동안 오태산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뒤를 돌아 이현우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 시선에는 전과는 다른 무게가 담겨 있었다. "태산." 이현우가 불렀다. "흑하성은 어떤 곳입니까." 오태산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답했다. "척박한 땅입니다. 겨울이 길고, 흙이 얼어붙어 농사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제게 그곳을 넘겼겠습니까." 오태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짐작이 있으시군요." 이현우가 다시 물었다. "짐작은... 말씀드리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왜입니까." "아직 확실하지 않은 것을 말씀드려 도련님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현우는 그 말에서 더 큰 불안을 느꼈다.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 오히려 무언가 확실한 것이 있다는 뜻처럼 들렸다. 오후 늦게, 이현우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숲의 공기가 갑자기 달라져 있었다. 습기, 흙냄새, 마른 잎의 냄새. 익숙한 냄새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로 낯선 것이 섞여 있었다. 쇠 냄새 같기도 하고, 짐승의 것 같기도 한 무언가였다. "왜 그러십니까." 오태산이 물었다. 이현우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숲은 조용했다. 바람도, 새소리도 없었다. 너무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풀벌레 소리조차 사라져 있었다. "누군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태산의 손이 검자루로 향했다. 숲의 정적이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눈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 쪽입니까." 오태산이 낮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느낌입니다." 오태산은 그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등불도 없이, 그는 조용히 몸의 방향을 틀어 이현우를 감싸듯 섰다. 그때, 나뭇잎 사이로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겁이 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끝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짙은 그림자가 저 멀리,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오태산은 검자루를 쥔 손을 풀지 않았다. 숲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조용함은,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조용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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