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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보내지 마." 이설아가 다시 말했다. 강태희는 펜을 든 채 미간을 좁혔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여기서도 보였다. "성녀님, 이건 제 임무입니다. 성녀직 포기는 왕국법상 신전 승인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제가 보고하지 않으면 저는..." "당신 임무는 나를 지키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녀님을 지키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 여기서 편안함에 취해 성녀직을 버리시면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성녀님도 아실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나는 부엌 문틀에 붙어 서서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접시가 들려 있었는데, 그걸 어디다 내려놔야 할지도 모른 채 그냥 서 있었다. 식탁 위에는 강태희가 쓰던 편지지 몇 장이 흩어져 있었다. 글씨체가 반듯한데 중간중간 줄이 그어진 흔적이 있었다. 몇 번을 고쳐 썼는지 알 수 있었다. "강태희." 이설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억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2년 전, 남부 순례 때. 당신이 몰래 마을 목욕탕에 들어갔던 거." 강태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손에 든 펜 끝이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며 작은 잉크 얼룩을 만들었다. "...그, 그건." "규율상 성기사는 임무 중 사사로운 편의를 취하면 안 되는데. 당신, 그날 밤 세 시간이나 그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았지." "성녀님, 그건 임무와 무관한..." "나오면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이런 게 세상에 존재하는데 왜 우리는 매일 찬물로 씻어야 하냐'고 했잖아." 강태희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손에 든 펜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하려다 실패했다. 성기사 갑옷을 입은 강태희가 목욕탕 앞에서 그런 대사를 했다는 게 좀처럼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당신, 신전 규율에 대해 한 번도 의심 안 해봤어?" "..." 강태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벽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나는 그 침묵이 어떤 무게인지 정확히는 몰랐지만, 뭔가 오래 묻어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저는..." 강태희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날 이후로 제 자신을 의심했습니다. 성기사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려 했습니다." "근데 지금 여기 와서 이 온천에 발을 담그고, 저 국수를 두 그릇씩 먹었잖아." "...그건." "당신도 알잖아. 이런 게 편하다는 걸. 이런 게 사람을 살게 한다는 걸." 이설아가 강태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표정은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이제까지 없던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온도차가 낯설었다. 지금까지 이설아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나는 3년 동안 매일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어. 매일 남의 죄를 씻어주고, 매일 남의 병을 대신 앓았어. 그게 성녀의 일이니까. 근데 여기 와서 처음으로,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한 거야.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매운 음식을 먹고, 부드러운 데서 잔 거. 그게 죄야?" 강태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편지 보내지 마. 나는 신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이게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라, 정말로 어떤 결정이 확정되는 순간이라는 걸 직감했다. 강태희가 펜을 내려놨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편지지 위에 마지막으로 그은 줄이 종이를 반쯤 찢어놓았다. "...만약 제가 이걸 막지 못한다면." 강태희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도 여기 남겠습니다. 성녀님을 감시하고, 필요하다면 신전에서 사람이 와도 제가 직접 상대하겠습니다." "그건 당신 임무를 저버리는 거 아니야?" "성녀님을 지키는 게 제 임무입니다. 성녀님이 여기 남으신다면, 저도 여기 남는 게 임무입니다." 강태희는 결국 자기 논리를 그렇게 정리했다. 억지스러운 결론이었지만, 그 순간 강태희의 눈빛에는 확실한 결심이 담겨 있었다. 저 논리로 신전 상급자를 설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강태희 자신은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이설아가 나를 돌아봤다. 처음으로 표정에 뭔가 담겼다. 아주 작은,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 "도윤." "...네?" 이설아가 부를 때마다 나는 늘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반응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딱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나는 여기 남을 거야. 이 집에서, 치료원을 열 거야." "치료원이요?" "성녀의 힘은 치유의 힘이야. 신전에 소속되지 않아도 이 능력은 쓸 수 있어. 이 마을에 치료원을 열고, 여기서 살 거야."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사흘짜리 손님이 아니었다. 이건 영구 정착 선언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그제야 식탁 위에 내려놨는데, 달그락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저기, 이설아 님. 그건 제 집인데요. 저한테 상의도 없이..." "만약 반대하면." 이설아가 조용히 말했다. 표정은 다시 무감해졌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서늘한 확신이 있었다. "나는 왕국에 이 마을 온천을 신고할 거야. 왕실 소유로 편입시켜달라고."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온천이 왕실 소유가 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건 협박이잖아요." "응, 협박이야." 이설아는 당당하게 인정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이렇게 당당하게 협박을 인정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옆에서 강태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다는 듯한, 포기한 듯한 한숨이었다. "저는 이 집을 왕국에 빼앗기기 싫으니까 그냥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지." 나는 한숨을 삼켰다. 이건 계약이 아니라 그냥 항복 문서였다. 협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상대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내가 뭘 어쩌겠나. 그날 오후, 나는 강태희가 대필해준 문서에 서명을 했다. 강태희의 글씨는 조금 전 떨리던 것과 달리 다시 반듯해져 있었다. 조항은 대략 이랬다. 이설아는 이 집에 거주하며 치료원을 운영한다. 도윤은 이설아와 강태희의 숙식을 제공한다. 그 대가로 신전이나 왕국의 개입은 이설아가 책임진다. 문서 맨 아래에는 날짜와 서명란이 있었는데, 강태희가 붉은 도장까지 준비해온 걸 보니 이 사람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예상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서명란에 손을 대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게 그렇게 나쁜 결말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슬쩍 들었다. 국수를 두 그릇씩 비우는 성녀와, 그 옆에서 세 그릇째를 몰래 훔쳐 먹는 성기사라니. 마을이 조용할 날은 없을 것 같았지만, 적어도 심심할 날은 없을 것 같았다. 서명이 끝나자마자 촌장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손에는 웬 서류철까지 들고 있었는데, 저건 또 언제 준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 잘됐구먼! 그럼 이걸로 우리 마을에 정식 치료원이 생기는 거 아닌가! 왕국 사신단을 초청해서 개원식을 크게 해야겠어!" "...촌장님, 잠깐만요. 사신단이요? 그건 또 무슨..." "신전 눈치 볼 필요 없지! 왕국 승인 받아서 정식으로 하면 아무도 못 건드려!" 촌장님은 벌써 마을 잔치 계획까지 세우고 있는 듯했다. 온천 마을에 성녀가 정착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고, 그러면 숙박업이 잘될 거고, 어쩌고. 나는 그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이설아를 봤다. 이설아도 나를 봤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강태희는 어느새 촌장님 옆에 서서 사신단 초청 절차에 대해 뭔가 조언을 하고 있었다. 신전 소속이든 아니든 왕실 행정 절차만큼은 빠삭하다는 게 새삼 느껴졌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개원식 날짜를 상의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 이 집에서 벌어질 일들의 규모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주 멀리 다온국 신전 쪽에서,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누군가가 조용히 눈을 뜨고 있다는 걸 나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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