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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다음 날, 나는 방 하나를 비우는 것부터 시작했다. 원래 창고로 쓰던 별채였다. 낡은 삽이랑 곡괭이, 못 쓰는 나무판자들을 마당 구석으로 옮기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먼지가 얼마나 쌓였는지 빗자루로 한 번 쓸었더니 안개가 낀 것처럼 앞이 안 보였다. 콜록거리며 창문을 열어젖히고, 걸레로 바닥을 세 번쯤 훔쳤다. 그러고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삼베 자루까지 뜯어냈다. 매트리스는 새로 하나 더 짰다. 마을에 하나뿐인 목공소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문고리도 튼튼한 걸로 갈았다. "국왕 다음가는 사람이 묵는다며. 그럼 문고리도 금박이라도 입혀야 하는 거 아니냐." 목공소 아저씨가 낄낄거리며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금박은 무슨, 여기는 도시도 아니고 국왕 다음가는 신분이 뭘 좋아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이 세계 기준으로 뭐가 특별한 대접인지 감이 안 잡히니, 그냥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튼튼하고 깨끗한 걸 넣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매트리스 위에 새 이불을 덮고, 베개도 두 개나 놓았다. 하나면 부족할까 봐. 촛대도 하나 더 갖다 놓았다. 밤에 불빛이 부족하면 곤란할 것 같아서. 준비를 다 마치고 방문 앞에 서서 한 번 더 훑어봤다.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창고 냄새는 안 났다. "그러니까 저는 왜 이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느냐."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답은 간단했다. 촌장님한테 밉보이면 이 마을에서 내가 발 디딜 곳이 없어진다. 3년 전, 알거지로 이 마을에 떨어졌을 때 나를 받아준 사람이 촌장님이었다. 그때 나는 신발도 한쪽 밖에 없었고, 가진 돈은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마을 어귀에서 쓰러져 있던 나를 발견한 게 촌장님이었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죽 한 그릇을 내밀어준 것도 촌장님이었다. 온천 파는 걸 허락해주고, 목재도 저렴하게 대준 것도 촌장님이었다. 그 뒤로 3년 동안, 나는 이 마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살아왔다. 빚이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진짜로 빚이 있다. 빚쟁이가 나체춤으로 협박하면 그냥 갚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녀라는 사람이 국제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몰라도, 우리 마을에는 도로도 없고 상점도 두 곳뿐이다. 지도에서 찾으려면 세 번은 확대해야 하는 위치다. 성녀가 여기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마을에 뭔가 활기가 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계산도 살짝 있었다. 민박집 손님이 늘 부족했으니까. 지난달 매출을 계산해봤을 때, 방 세 개 중 두 개가 비어 있는 날이 절반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온천 보수비도 못 뽑을 판이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이유는 대체로 이렇게 소소하고 현실적이다. 드라마틱한 이유 같은 건 없다. * 전날 밤에는 잠을 설쳤다. 온천 탈의실 나무 바닥이 삐걱거려서 아침에 목공소 아저씨를 다시 불렀다. 손님용 수건도 새로 세 장을 더 빨았다. 세제가 부족해서 마을 상점까지 뛰어가야 했다. 상점 주인아주머니가 뭘 그렇게 급하게 사냐고 물었을 때, 성녀님이 온다고 답했더니 눈이 두 배로 커지면서 세제 값을 반으로 깎아줬다. 소문이 빠른 마을이라 다행이었다. 다음 날 정오, 마을 어귀에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마차치고는 화려했다. 흰 천으로 감싼 지붕에 다온국 신전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바퀴가 굴러오는 소리부터 이 마을에서 나는 소리와 달랐다. 덜그럭. 덜그럭덜그럭. 마을 사람들이 슬금슬금 모여들어 구경했다. 아이들은 마차 바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떠들었고, 어른들은 팔짱을 낀 채 멀찍이서 지켜봤다. 나는 촌장님 옆에 서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머리도 대충 넘겼다. 그래봤자 촌장님만큼 그럴듯해 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촌장님은 이럴 때를 대비해 아껴둔 게 분명한 자수 조끼까지 꺼내 입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끼익. 먼저 내린 건 은빛 갑주를 입은 여자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곧았다. 짧게 자른 흑발에 눈빛이 날카로웠다. 허리에는 검이 채워져 있었는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보니 아마 습관 같았다.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에도 시선이 사방을 훑는 게 보였다. 지붕, 나무, 사람들 얼굴 하나하나까지. 마을 전체를 스캔하는 것 같았다. "강태희입니다. 성녀님의 호위 성기사입니다." 목소리가 딱딱했다. 군인 같았다. "아, 네. 저는 도윤입니다. 여기 민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존댓말은 자동으로 나온다. 낮아 보이는 위치의 사람 앞에서도 존댓말이 나오는 건 한국인의 습성인지, 아니면 내가 원래 그런 성격인지 모르겠다. 강태희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짧게 고개를 숙였다. 경계심이 그대로 느껴졌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심문할 수 있다면 딱 저런 눈이었을 거다. "숙소 구조를 미리 확인하고 싶습니다." "아, 예. 지금 보러 가시겠습니까?" "나중에. 우선 성녀님부터." 이해는 한다. 나도 낯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왕국 서열 2위를 재우라는 말을 들으면 경계할 것 같다. 오히려 안 경계했으면 이 사람이 직무유기다. 마차 안에서 두 번째 인물이 내렸다. 흰 로브에 은실로 자수를 놓은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는 은발이었는데 자연스러운 색인지 염색인지 알 수 없었다.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완전히 무표정이었다. 눈은 크고 맑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리는 동작조차 어딘가 인형 같았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에도 표정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설아입니다." 목소리도 표정과 똑같이 무감했다. 그게 다였다. 인사가 끝나고도 이설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누군가는 "성녀님이 저렇게 무섭게 생겼나" 하고 속삭였고, 누군가는 "그래도 예쁘시네" 하고 맞받았다. 이설아는 그 소리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그냥 주변을 둘러보다가, 마을 뒤편에서 올라오는 온천 김을 발견하고는 눈이 살짝 커졌다. 아주 살짝이었다. 놓쳤으면 못 봤을 정도로. "저게 뭡니까." 처음으로 감정이 섞인 질문이었다. "저희 집 온천입니다." "온천." 이설아는 그 단어를 되뇌었다. 마치 낯선 언어를 배우는 사람처럼. 입안에서 발음을 굴려보는 것 같았다. 촌장님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성녀님, 이 마을이 좀 초라해도 목욕 시설은 왕국 어디에도 없는 물건입니다! 자, 어서 가서 짐 푸시고 좀 쉬세요." 강태희가 미간을 좁혔다. "짐은 신전에서 보낸 대로 최소한만 왔습니다.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니까요." "오래 머무실 계획이 아니라니요?" 나는 되물었다. "마을 순례 일정입니다. 사흘 정도 머물며 축복 의식을 진행하고 다음 마을로 이동합니다. 계획표대로 움직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사흘. 사흘이면 견딜 만하다. 나는 조금 안심했다. 방 정리도 끝났고, 수건도 새로 빨았고, 촛대도 두 개나 갖다 놨으니 사흘이면 큰 무리 없이 지나갈 거라고 믿었다. 그 안심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는 그날 저녁이 되기도 전에 알게 됐다. * 집으로 향하는 길, 이설아는 계속 뒤를 돌아보며 온천 쪽을 살폈다. 걸음도 점점 느려졌다. 강태희가 몇 번이나 "성녀님, 앞을 보십시오"라고 주의를 줬지만 소용없었다. 나중에는 강태희가 이설아의 팔을 슬쩍 붙잡아 방향을 돌려주기까지 했다. 이설아는 그때마다 마치 자석처럼 다시 온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녀님, 순례 첫날부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보고 있는 것뿐입니다."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넋을 놓고 계십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뒤에서 듣고 있자니, 이게 성기사와 성녀의 관계인지 보호자와 아이의 관계인지 헷갈렸다. 나는 괜히 웃음이 나올까봐 입술을 꾹 눌렀다. 집에 도착해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설아는 곧장 온천 데크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빨랐다. 강태희가 황급히 따라붙었다. "성녀님, 어디 가십니까." "저 물이 뜨겁습니까." 이설아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목소리 끝이 아주 살짝 떨렸다. 나는 그 순간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네. 뜨겁습니다. 온도 조절도 가능하고요." "온도 조절." 다시 그 단어를 되뇌는 버릇. "들어가도 됩니까." 강태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성녀님, 지금은 축복 의식 준비를 하실 시간입니다. 목욕은 나중에." "지금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설아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단호해졌다. 표정 없는 얼굴에 눈빛만 조금 강렬해졌다. 나는 그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 뭔가 위험하다. 어떤 위험인지는 정확히 몰랐다. 온천에 미친 성녀라는 게 어떤 유형의 위험인지, 여태 겪어본 적이 없어서 판단이 안 섰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사흘이 절대 조용히 지나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강태희가 이설아를 말리며 뭐라고 계속 설득하는 소리가 들렸다. 축복 의식 시간표를 대며, 신전에서 정한 순서를 대며, 여러 이유를 갖다 붙였다. 이설아는 그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대꾸도 없이 계속 온천 데크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마당 한구석으로 물러섰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국왕 다음가는 사람과 왕국 기사 사이의 다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빗자루를 하나 집어 들고 괜히 마당을 쓸었다. 안 그래도 될 만큼 깨끗한 마당이었지만, 뭔가 손이라도 움직이고 있어야 이 상황에서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결국 이설아는 온천에 들어갔다. 강태희가 끝까지 반대했다. 목소리를 낮췄지만 다급함은 그대로 느껴졌다. 의식 준비도 안 끝났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성녀가 온천 물에 들어가는 그림이 좋을 게 없다는 논리였다. 나름 타당한 말이었다. 나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설아가 딱 한 문장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제가 성녀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강태희는 입을 다물었다. 더 반박할 말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계급이 이렇게 명확한 조직인가 싶었다. 나는 그 위계질서를 보며 이게 앞으로 사흘, 아니 어쩌면 그 이상 계속될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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