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사흘 밤을 폐허에서 보낸 도윤의 몸은 이미 지쳐 있었다. 허물어진 담벼락 아래 몸을 웅크리고 밤을 넘긴 지 세 번째였다. 이슬에 젖은 옷은 마를 새도 없이 다시 젖었고, 배는 오래전부터 아무것도 넣지 못해 허공을 씹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늘어선 수레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드디어 왔다.'
그는 몸을 일으켜 담벼락 뒤에서 상황을 살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지금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버틴 사흘이었다.
수레 행렬 뒤로 무장한 인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창을 든 자들과 활을 멘 자들이 뒤섞여 열을 맞춰 걸었고, 그 발소리만으로도 훈련된 무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상단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은 군대처럼 보였다. 그 무리 가운데, 유독 시선을 끄는 인물이 있었다. 검은 긴 머리를 뒤로 넘긴 여인이었다. 은백색 갑옷이 몸에 맞춘 듯 정갈했고, 허리에 찬 장검의 손잡이엔 손때가 짙게 묻어 있었다. 나이는 젊어 보였지만, 걸음걸이와 눈빛에는 수많은 실전을 거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늘함이 배어 있었다.
'저 사람이다.'
도윤은 직감했다. 검성 한서윤. 명성만큼이나 위압적인 존재감이었다. 오는 길에 주막에서 얻어들은 소문으로는, 그녀가 이끄는 상단은 산길에서 도적 떼를 만나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지나간다고 했다. 검을 든 그녀 앞에서 버틴 도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도윤은 반쯤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걸어오는 그녀를 보니 그 소문이 오히려 축소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행렬은 창고 앞에 멈춰 섰다. 짐을 내리는 소란이 이어지는 사이, 한서윤은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홀로 섰다. 마치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 익숙한 듯한 태도였다. 그녀를 따르는 표사들도 그런 그녀에게 함부로 다가가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저 눈으로만 그녀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지금이다.'
도윤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담벼락에서 나섰다. 다가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멈추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늘 하시던 말이 떠올랐다.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다.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 한다.' 그 말을 붙잡고 걸었다.
"실례합니다." 도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말을 걸었다.
한서윤의 시선이 즉시 그에게 꽂혔다. 그 눈빛엔 놀람보다 경계가 먼저 서려 있었다. 낯선 자가 이렇게 가까이 접근했다는 사실 자체를 이미 경계하는 눈치였다.
"누구냐."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저 사실을 확인하려는 어조였다.
"강도윤이라고 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사흘을 기다렸습니다." 도윤이 말했다.
순간 한서윤의 손이 허리춤의 검으로 향했다.
스르릉-
검이 반쯤 뽑히는 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주변 상단 인원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한서윤의 시선은 오직 도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표사 몇이 창을 겨누며 다가서려 했으나, 그녀가 살짝 손을 들어 저지했다.
"사흘을 기다렸다는 말은, 나를 노리고 미행했다는 뜻이겠지." 그녀가 낮게 말했다.
"오해입니다. 저는 다만 도움을 청하러 온 것뿐입니다." 도윤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도움을 청하는 자가 사흘씩 뒤를 밟나." 한서윤의 검이 마침내 완전히 뽑혔다. 서늘한 칼날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도윤은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물러서면 이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가 떨렸지만 발은 그 자리에 박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제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능력이라." 한서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말을 하는 자들이 대개 어떤 부류인지 아나."
"사기꾼이거나 정신이 이상한 자겠지요." 도윤이 답했다.
"정확히 안다면, 왜 그런 취급을 자처하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미세한 의문이 섞였다.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도윤이 짧게 답했다.
한서윤은 그를 잠시 바라봤다. 검을 겨눈 채였지만, 눈빛엔 순수한 경멸이 아니라 계산이 담기기 시작했다. 상단 인원 몇이 다가와 그녀를 도우려 했지만, 그녀는 손짓 하나로 그들을 물러서게 했다.
"어떤 능력이지." 그녀가 물었다.
"두 세계를 오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곳과, 제가 원래 살던 세계를 말입니다." 도윤이 말했다.
순간 한서윤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도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얼굴이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흐려졌다가 다시 원래의 서늘함으로 돌아왔다. 그 짧은 틈이 도윤에게는 확신이 되었다.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나." 그녀가 다시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확인할 기회를 주십시오." 도윤이 답했다.
"확인이라는 게 어떤 방식이지." 한서윤이 물었다. 검은 여전히 그의 목 앞을 겨누고 있었다.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도윤이 말했다.
한서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변 인원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벌어질 소란을 걱정하는 듯 눈치를 살폈고, 누군가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짐을 내리던 인부들도 하나둘 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만약 거짓이라면." 한서윤이 검 끝을 살짝 들어 그의 목에 더 가까이 대며 말했다.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도 상관없습니다." 도윤이 답했다.
그 말에 한서윤은 잠시 침묵했다. 목숨을 걸겠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나올 수 없는 태도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다시 한 번 살펴봤다.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었다. 남루한 옷차림, 며칠은 씻지 못한 얼굴, 그러나 눈빛만은 흐트러지지 않은 사내였다.
"좋다. 보여줘 봐라."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검은 여전히 거두지 않은 채였다.
도윤은 마른 숨을 삼켰다. 사흘을 기다려 얻은 이 순간, 실패하면 정말로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그는 그것을 억누르며 마음속으로 스킬을 떠올렸다. 익숙한 감각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처음 이 능력을 깨달았을 때의 당혹감이 잠시 스쳤다. 그때도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능력을 시험했었다.
'실패하면 끝이다.'
그는 그렇게 되뇌며 눈을 감았다. 몸이 서서히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된 감각이 점차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몸이 물속에 잠기듯,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한서윤의 검 끝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놀람이 서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봐온 어떤 마법이나 스킬과도 다른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다시 풀렸다.
"이건..." 그녀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빛이 점점 강해졌다. 도윤의 몸이 반쯤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주변 상단 인원들 사이에서 비명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몇몇은 뒤로 물러나며 서로를 붙잡았고, 몇몇은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한서윤의 검이 그의 목을 향해 짧게 튀어 나갔다.
쉭-
"멈춰!" 그녀가 낮게 외쳤다. 도윤의 몸이 사라지기 직전, 검 끝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