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백작가로 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계속 창밖만 봤다.
덜컹거리는 마차 바퀴 소리가 자갈길에 부딪치는 소리로 바뀌었다가, 다시 흙길의 부드러운 소리로 돌아왔다가 했다. 그 사이사이 나는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선우하영. 선우하영. 게임 속에서 수백 번은 봤던 이름인데, 이렇게 실제로 만나러 가는 상황이 되니까 이상하게 낯설었다. 마치 좋아하던 아이돌을 실물로 보러 가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것보다는 좀 더 무거운 느낌이었다. 좋아하던 아이돌이 사실은 몇 년 후에 죽는다는 걸 알고 만나러 가는 느낌.
마을을 벗어나 언덕을 넘자 저 멀리 하얀 성벽이 보였다. 은강 백작가의 저택이었다. 게임에서는 정지 이미지로 몇 초 스쳐 지나가던 배경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하얀 대리석 기둥, 넓은 정원, 그리고 그 모든 걸 감싸는 높은 담장.
와.
나도 모르게 그 한 글자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부 아저씨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
"처음 보시는 분들은 다 그렇게 놀라시더군요. 은강가 저택이 왕도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하니까요."
세 손가락 안. 그 정도면 게임에서 왜 배경으로 몇 초밖에 안 썼는지 이해가 안 갈 지경이었다. 그래픽 리소스가 아까웠나. 아니면 개발자들이 이 저택 하나 그리는 데 예산을 다 쓴 건지도 모르겠다.
마차가 정문에 도착하자 집사로 보이는 사람이 나를 맞이했다. 새하얀 셔츠에 검은 조끼,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 딱 봐도 이 집 서열이 꽤 높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이도윤 님이시군요. 백작님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님이라는 존칭이 낯설어서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며칠 전까지 밥그릇 뒤집히던 고아원 꼬맹이한테 님이라니.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가장 비현실적인 순간이 지금이 아닐까 싶었다. 몬스터한테 쫓기는 것보다, 갑자기 존댓말을 듣는 게 더 어색했다.
집사를 따라 걸으며 나는 저택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복도 벽마다 걸린 초상화들, 반짝이는 샹들리에, 발밑에서 소리 하나 나지 않는 두꺼운 카펫. 이런 델 게임 배경으로 몇 초만 썼다니, 그때 개발자들 진짜 눈이 삐었었나보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큰 키, 짙은 눈썹, 위엄 있는 얼굴. 게임 스틸컷에서 봤던 선우재현 백작 그대로였다. 스틸컷보다 실물이 더 압도적이었다. 저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서면 그냥 화면이 꽉 찰 것 같았다.
"네가 이도윤이구나."
"네, 백작님."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백작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더니,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검술을 좀 한다고 들었다."
"조금요."
"조금이라. 겸손하구나."
백작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내 딸 이야기는 들었을 거다."
"네."
"그 아이는... 친구가 없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도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때문에."
백작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위엄 있는 얼굴 아래 숨겨져 있던 피로와 걱정이 그 순간 잠깐 드러났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게임에서는 이 사람 얼굴이 이렇게 무너지는 씬이 없었는데. 있었다면 아마 유료 DLC였겠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라니, 이 세계에서 그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요?"
내가 묻자 백작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륙에서는 검은색이 재앙의 색으로 통한다. 오래전 대재해가 있었을 때, 그 재해를 불러왔다는 마녀가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졌다는 전설이 있어서다. 미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특히 어린아이들은 더 그렇고."
미신 하나 때문에 애 하나가 통째로 고립된다는 게, 현대인의 사고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근데 이 세계에서는 그게 그냥 현실이라는 거지. 혈액형으로 성격 나누던 것도 웃겼는데, 이건 그보다 훨씬 잔인한 버전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지키고 싶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해줄 수 있는 게 한계가 있더구나. 그 아이가 필요한 건 진짜 친구야. 신분이나 소문에 흔들리지 않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게임 속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았던 이 남자의 진심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원작에서는 그저 하영을 두려워하고 방치하는 냉정한 아버지로 묘사됐던 인물인데, 실제로 앞에서 마주한 그는 그냥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였다.
게임 설정집에는 이런 내용이 한 줄도 없었다. 선우재현: 냉정하고 계산적인 인물. 딸에게 무관심하며 정략을 위해 이용함. 그게 전부였다. 근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그 한 줄짜리 설명이 전부 거짓말인 것처럼 보였다. 아니, 거짓말은 아니겠지. 다만 절반만 말한 거지. 이 사람도 하영이를 지키려다 실패한 쪽에 가까운 거고.
"제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해볼게요."
"고맙구나."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처음으로 옅게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저 정원 끝에, 유리로 된 작은 온실이 보이니?"
나는 백작이 가리킨 방향을 봤다. 정원 끝, 나무들 사이로 반짝이는 유리 온실 하나가 보였다. 오후 햇살을 받아서 유리 표면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저 안에 자주 있단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온실에서 뭘 하는데요?"
"모른다. 정원사 말로는 화초를 돌본다고 하던데... 나도 직접 본 적은 없다. 내가 다가가면 항상 자리를 피하니까."
그 말에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아버지가 딸이 뭘 하는지도 모른다니. 근데 그게 저 사람이 무심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다가가려다가 계속 튕겨나간 결과라는 걸 알아서 더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그 온실을 바라보며, 심장이 다시 이상하게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가서 만나봐도 될까요?"
백작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다가가야 할 거다. 그 아이는... 누군가 다가오는 걸 무서워하니까."
"무서워한다고요?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워하는 게 아니라요?"
"둘 다다. 외로우면서도 무서워하지. 다가오면 상처를 받을 걸 아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는 거다. 나도... 그 마음을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을 나섰다.
정원을 가로질러 온실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나는 게임 속 수백 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아이가 어떻게 웃었는지, 어떻게 울었는지, 어떻게 무너졌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결말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정원의 장미는 붉었고, 잔디는 푸르렀고, 저 멀리 분수는 하얗게 물을 뿜고 있었다. 색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유일하게 검은 존재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봤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온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유리창 너머로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는 작은 아이.
나는 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드디어, 선우하영이었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그 작은 등이, 게임 속 CG로 봤던 그 어떤 장면보다 더 선명하게 내 눈에 박혔다. 화질 4K로 봐도 이런 느낌은 안 났을 텐데. 실물의 힘이란 이런 건가.
나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손이 떨렸다.
이 문을 열면, 이제 정말로 게임이 아닌 현실이 시작된다는 걸 알았다. 저 안에 앉아 있는 아이는 이제 데이터가 아니라, 진짜로 숨 쉬고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잘못 다가가면 정말로 다치고, 내가 잘 다가가면 정말로 웃을 수 있는 사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시험 결과 발표 직전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서, 이 아이의 결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지금 이 문 앞에 서 있으니까.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