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사 손자, 낙제생이 되다

5화

빛의 소용돌이는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안에서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몸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손도 없고, 발도 없고, 숨을 쉬는 감각조차 없었다. 다만 의식만이, 소용돌이의 결을 따라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다는 감각뿐이었다. 이게 죽음인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또 다른 생각이 스쳤다. 죽음이라면 이렇게 선명할 리가 없잖아.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다는 방향성, 그게 죽음이라면 너무 능동적이지 않은가. 중간중간 이상한 장면들이 스쳤다. 돌로 지어진 커다란 건물, 그 안에서 검을 겨루는 사람들. 낯선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떠드는 목소리들. 웅성거림 속에 섞인 웃음소리와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 이게 뭐야, 대체.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장면들이 다시 흩어졌다. 마치 물에 떨어진 잉크 방울이 퍼지듯, 방금 본 것들이 색깔만 남기고 사라졌다. 빛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딘가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처럼. 소용돌이의 속도가 느려지는 게 느껴졌다. 아니, 느껴진다는 표현도 이상했다. 느낀다는 감각기관 자체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게 멈췄다. 정말로,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정지였다. 눈을 뜬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눈이라는 게 다시 생겼다는 감각이 먼저였다. 눈꺼풀이 존재한다는 것, 그걸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천장이 보였다. 낡은 나무 서까래, 그 사이로 비치는 흐릿한 햇살. 먼지가 빛줄기 속에서 천천히 떠다니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손끝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남의 몸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위화감이 있었다.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손가락 하나를 겨우 까딱였다. 그것도 몇 초는 걸린 것 같았다. 팔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근육처럼, 아니 어쩌면 처음 쓰는 근육처럼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시야 끝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사람 형체. "...깨어났어?" 낯선 목소리였다. 여자 목소리, 그런데 말투가 이상했다. 억양이 어딘가 낯설었다. 한국어인데 한국어가 아닌 것 같은, 묘하게 뒤틀린 리듬. 고개를 겨우 돌렸다. 목뼈가 뻐근했다. 시야에 잡힌 건 초록빛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머리에는 나비 모양 핀이 꽂혀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쯤 위로 보였다. "누구세요..." 목소리가 이상하게 낮고 걸걸했다.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거 내 목소리 아니잖아. 내가 알던 내 목소리는 이것보다 훨씬 가늘었다. 그런데 지금 나온 소리는 성인 남자의, 게다가 어딘가 상처를 입은 것처럼 쉰 목소리였다.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나." 또 다른 목소리였다. 이번엔 저음의 남자 목소리였는데, 뭔가 울림이 이상했다. 사람 목소리라기보다는 짐승 울음이 뒤섞인 느낌. 마치 목구멍 속에 작은 종을 넣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2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체구, 청회색 피부, 온몸을 덮은 비늘 같은 무언가, 그리고 머리 양쪽으로 솟은 뿔. 손톱은 짐승의 발톱처럼 길고 두꺼웠다. 숨이 턱 막혔다. "뭐, 뭐야 저건."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 순간 통증이 옆구리를 관통했다. "으윽!" 칼로 베인 것 같은, 아니 실제로 베였던 흔적이 남아있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살이 당겨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상처가 완전히 안 붙었어." 초록 옷을 입은 여자가 다가와 내 어깨를 눌러 눕혔다. 손길은 단호했다. 오래 이런 일을 해온 사람의 손길이었다. "당신 지금 며칠째 죽어 있었는지 알아? 라온이 없었으면 진짜 못 살았어." "라온...?" "나야, 나. 요괴족 라온." 거대한 존재가 씩 웃었다. 이가 날카로웠지만 표정 자체는 순박해 보였다. 웃는 모습이 어딘가 커다란 개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뿔 달린 개. 혼란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요괴족이라니. 여긴 대체 무슨 세계야. 내가 알던 세계에는 저런 존재가 없었다. 적어도, 진짜로 살아 움직이며 나를 내려다보는 존재는 없었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예요? 저는 분명 계룡산에 있었는데." "계룡산? 그게 어디 있는 나라야?"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라는 표정이었다. "여기는 이현 학원 부속 진료소야. 넌 여기 학생이고." "학생이요? 저는 학생 아닌데요." 말을 뱉으면서도 이상함을 느꼈다. 목소리도, 몸도, 다 낯설었다. 게다가 학생이라니. 나는 학원이라는 곳에 다닌 적이 없었다. 여자가 손거울 하나를 집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직접 봐."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본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내 얼굴이 아니었다. 낯선 소년의 얼굴. 짙은 눈썹, 갈색 눈동자, 이마 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 분명 어딘가 익숙한 듯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뺨에 가느다란 상처 자국이 하나 있었다. 오래된 것 같았다. "이게... 뭐예요..." 목소리가 떨렸다. 손가락을 들어 뺨을 만졌다. 거울 속 얼굴도 똑같이 움직였다. 내 손이, 내 것이 아닌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어디서 왔어요? 저는 이판이라는 사람인데." 순간 여자와 라온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표정이었다. 그 눈빛 교환이 몇 초쯤 이어졌다. "이판." 여자가 그 이름을 되풀이했다. "그게 당신 이름이야. 지금도, 원래도." "네?" "이 몸의 주인 이름이 이판이야. 이현 학원 무술과 소속, 자작가 후계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같은 이름. 다른 몸. 다른 세계.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정확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사람 몸에 들어온 건가요?" "그렇지.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우리도 거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당신을 발견한 것뿐이니까." "거울에서요?" "응. 이 근처 낡은 사당에 있던 거울에서, 빛이 터지더니 당신이 튀어나왔어.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이미 며칠 전에 죽어 있었고." 죽어 있었다는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죽어 있던 몸에 제가... 들어간 거예요?" "그런 셈이지." 라온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운 좋은 거야. 그 몸, 완전히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살릴 수 있었거든. 조금만 늦었어도 다 끝났을 거야." 살릴 수 있었다는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들렸다. 죽었던 몸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는 것.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고생이 들었을지 짐작조차 안 됐다.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머릿속이 뒤섞이는 느낌이었다. 계룡산의 기억, 할아버지의 얼굴, 삽에 맞아 쓰러지던 순간. 그리고 그 위로, 낯선 기억의 파편들이 겹쳐 올라오고 있었다. 낯선 얼굴들, 낯선 수업, 그리고 누군가와의 대결. 압도적인 패배. 이겨보지 못한 상대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게 뭐야..." 머리를 감싸쥐었다. 두 개의 삶이 한 머릿속에서 뒤엉키고 있었다. 어느 게 진짜인지, 순간적으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판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기억이, 내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밀려올 때도 있었다. 이러다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리는 거 아냐. "괜찮아?"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성함이..." "임서린. 이 진료소 담당 의사야." "임서린 선생님." 나는 그 이름을 되뇌며,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이름을 붙잡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같았다. "제가... 이 몸의 주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임서린과 라온이 다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번엔 뭔가 더 무거운 침묵이었다. 라온의 커다란 손이 슬쩍 주먹을 쥐는 게 보였다. "그건..." 임서린이 말을 아꼈다. "나중에 얘기해 줄게. 지금은 몸부터 추스려." 그 대답이 오히려 더 불안을 키웠다. 나중에 얘기해준다는 말은, 지금 말하면 안 될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이 몸의 주인은, 어떤 방식으로 죽었길래. 두 사람의 표정에서, 그냥 사고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뭔가 더 복잡하고, 더 위험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옆구리의 통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 상처를 만든 게 뭔지, 언젠가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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