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몸이 없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공중에 떠서, 할아버지가 내 몸을 끌어안고 우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이상하게도 슬픔이 곧바로 오지 않았다. 그냥 멀거니,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발이 없는데도 서 있는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손이 없는데도 뭔가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영혼이라는 걸까. 이렇게 붕 뜬 상태로, 내 몸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게.
"판아, 판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손이 상처를 누르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몸에서 빠져나온 지금, 저 아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이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게 보였다. 그냥 멈춰 있었다. 마치 시간이 그 상처 주변만 정지시킨 것 같았다.
"이럴 수가 없어. 이럴 수가."
할아버지가 몸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평생을 도사로 살아온 사람이 저렇게 무너지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항상 태산 같던 사람이었다. 화가 나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위험한 순간에도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저 사람은 그냥 늙은 노인이었다. 손자를 잃은.
죄책감이 뒤늦게 올라왔다.
내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아니, 그럼 할아버지가 맞았을 텐데.
생각을 이어가다가 나는 조용히 인정했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이상한 확신이었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니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지금도, 그 판단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별채 안에서 다시 그 청록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강한 빛이었다.
창호지 틈새로 새어 나오던 빛이 아니었다. 이번엔 문짝 전체가 빛을 내뿜었다. 마치 그 안에 작은 태양이라도 들어앉은 것처럼.
빛이 마당까지 번져 나왔다. 할아버지의 몸이 그 빛에 잠기듯 감쌌다.
"이게..."
할아버지가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얼굴에 청록빛이 반사되어 이상하게 일렁였다.
빛의 중심에서 서서히 형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처음엔 흐릿한 윤곽이었다가,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마치 물속에서 뭔가가 떠오르는 것처럼, 느리고 무겁게.
하얀 수염, 흰 도포, 그리고 온몸을 감싼 은은한 청기.
노인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빛 같았다.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공기 중에 존재하는 하나의 현상처럼 보였다.
"이게 정말..."
할아버지가 숨을 삼켰다. 목소리에 경외와 두려움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태상노군님."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형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 년의 공양이 헛되지 않았구나."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였다.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바람과 물소리가 뒤섞인 것 같았다. 그 소리가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가슴 어딘가로 직접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존재를 멍하니 바라봤다. 몸이 없는 채로도, 나는 뭔가 압도적인 기운을 느꼈다. 무릎이 있었다면 저절로 꺾였을 것 같았다.
"이 아이는 아직 갈 곳을 정하지 못했다."
형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정확히는, 내가 있는 위치를 향했다. 몸이 없는 나를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눈빛 아래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곳이 없었다.
"살릴 수 있소이까."
할아버지가 다급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자세였다.
"할 수는 있다."
형체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손끝에서 청기가 흘러나왔다. 실처럼 가늘게 뻗어 나오다가, 곧 굵은 줄기가 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무슨 대가라도 치르겠소. 저 아이를, 제 손자를 돌려주시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실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저릿해졌다.
이렇게까지 나를 위해서.
평생 흙만 만지고, 부적만 그리고, 산 밖으로 나가는 일도 드물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흥정하고 있었다.
"대가는 이 아이가 치를 것이다."
형체가 나를 다시 향했다.
"들리느냐."
그 목소리가 곧바로 내 안으로 울렸다. 몸이 없는데도, 그 말은 정확히 나에게 전달됐다. 마치 뇌 속에 직접 문장이 새겨지는 것 같았다.
"...들려요."
대답이 저절로 나왔다. 이상하게도 존댓말이 나왔다. 이 존재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천 년간 이 가문이 나에게 바친 공양이 있다. 그 힘으로 너를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이 도관을 평생 지켜라. 너뿐이 아니다. 네 자손까지, 이 계약에 묶일 것이다."
순간 말이 막혔다.
평생. 자손까지.
그건 단순한 목숨 값이 아니었다. 대대로 이어지는 사슬이었다. 내가 낳지도 않은, 낳을지조차 모르는 자손의 삶까지 저당 잡히는 일이었다.
이게 맞는 걸까.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는 걸까.
"싫다면, 지금 이대로 소멸한다."
형체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전달하듯 건조했다. 마치 오늘 날씨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이 없는 채로도 뭔가를 느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한 냉정함이었다. 죽음이라는 게 이렇게 담담하게 다가올 수도 있구나.
할아버지를 봤다. 저 아래, 여전히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노인. 저 사람에게 이런 부담을 지게 해도 되는 걸까.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는 이미 이 계약 아래 살아왔다. 달라지는 건 없다."
형체가 짧게 답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도 이미 이 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뜻이었다. 평생 이 산속 도관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가, 단순히 도를 닦기 위해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사실 생각할 시간도 별로 없었다.
죽는다. 아니면 평생 이 산속에 묶인다.
두 개의 선택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게 우스웠다. 인생 통틀어 이렇게 형편없는 선택지는 처음이었다.
"판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할아버지가 문득 그렇게 말했다. 놀랍게도, 강요가 아니었다.
"네가 살고 싶다면 살아라. 하지만 그게 억지로라면, 나는 너를 이렇게 묶고 싶지 않다."
그 말에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이 노인은, 마지막까지 내 자유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 목숨보다, 자기가 평생 짊어져온 그 계약보다, 내 선택을 먼저 물었다.
"할아버지."
"음."
"저 그냥, 살고 싶어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사실이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계약이 무겁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살고 싶었다. 무겁다고 해서 죽음을 택할 만큼 그게 두렵진 않았다.
"그럼 됐다."
형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 말과 동시에, 청기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빛이 나를 감쌌다. 형체가 없는 존재를 그 빛이 붙잡듯 휘감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냥 압도적인 무언가가 온몸을, 아니 온몸이라 부를 것도 없는 나 자체를 짓눌렀다.
"어, 어어?"
갑작스러운 감각에 놀랐다. 몸이 없는데도 뭔가에 끌려가는 느낌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목덜미를 잡아 끄는 것 같았다.
빛의 중심, 별채 안에 놓인 거울이 다시 강렬하게 빛났다.
거울 표면이 물처럼 일렁였다. 그 안으로 빛이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배수구로 물이 빠지는 모습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마지막으로 외쳤다. 할아버지가 뭔가 소리쳤지만, 이미 그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입 모양만 겨우 보였다. 뭐라고 하는 건지,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시야가 온통 청록빛으로 가득 찼다. 마치 물속에 완전히 잠긴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빛 너머로, 뭔가 다른 세계의 조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낯선 건물, 낯선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파편들.
이게 뭐지.
건물들은 이상하게 높았다. 저런 높이의 목조 건물이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들이 입은 옷도 도포나 저고리 같은 게 아니었다. 처음 보는 재질, 처음 보는 형태였다.
그리고 소리. 분명 말소리인데, 한 글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파편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각할 틈도 없이, 빛이 나를 완전히 삼켰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이거였다.
나,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