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아침 내내 할아버지는 별채 주변을 서성였다.
평소라면 정오까지 경전을 읽던 사람이 오늘은 도구함을 뒤적이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열었다가 닫는 소리가 반복됐다. 철커덕, 철커덕. 나는 마루에 앉아 그 소리를 세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뭐 찾으세요?"
"부적이다. 오래된 거."
"부적이 왜요?"
할아버지가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그 눈빛에 잠깐 뭔가 스쳤다. 걱정, 혹은 두려움 비슷한 것. 나는 그 표정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할아버지는 늘 무슨 일이든 태연하게 넘기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서 신경 쓰지 말라니. 나는 속으로 웃었다. 어른들은 늘 저런 식이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오히려 더 걱정하게 만든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을 텐데, 왜 저렇게 감추려고만 하는 걸까.
할아버지는 결국 오래된 서랍 맨 아래에서 누렇게 변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붓글씨로 뭔가 쓰여 있었는데 반쯤 지워져 알아볼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걸 소매 안에 넣고는 아무 말 없이 별채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저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오후에는 마당을 돌며 청소를 했다. 낙엽을 쓸다가 담벼락 아래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발자국.
신발 자국이었다. 도관에는 신발 신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할아버지도 나도 늘 고무신을 신는다. 그런데 이 자국은 밑창 무늬가 뚜렷했다. 등산화 같은, 산속에는 어울리지 않는 발자국.
빗자루를 든 손이 멈췄다.
"할아버지, 이거 보세요."
할아버지가 다가와 발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아침에 봤던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걱정, 두려움. 그게 지금 확신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있었느냐."
"모르겠어요. 오늘 처음 봤어요."
할아버지가 허리를 굽혀 흙을 만졌다. 손끝에 흙이 살짝 묻었다. 흙을 비벼보고, 코앞에 가져가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흙에서 뭘 알아낸다는 건지.
"오늘 새벽에 생긴 것 같다."
순간 어제 밤 창밖에서 봤던 그림자가 다시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나뭇가지가 흔들린 거라고 넘겼었는데.
"할아버지, 어제 저 그림자 같은 거 봤어요. 별채 쪽에서."
"뭐라?"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크게 튀었다. 나는 조금 놀라 뒤로 물러섰다. 평소 할아버지 목소리는 낮고 느릿한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왜,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듯 걸터앉았다. 마당 한복판, 볕이 잘 드는 자리였는데도 할아버지 얼굴엔 그늘이 진 것 같았다.
"판아, 내가 미리 말을 해뒀어야 했는데."
"뭘요?"
"저 별채에 우리 가문이 대대로 모셔온 거울이 있다."
"거울요?"
나는 별채를 바라봤다. 낡은 건물, 늘 문이 잠겨 있던 곳. 어릴 때 몇 번 몰래 들여다보려다 혼난 기억이 있다.
"오래된 물건이다. 태상노군의 신물이라고 전해지는데—"
할아버지가 잠깐 말을 끊고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무거웠다.
"요즘 그 거울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문화재 밀매업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얘기지, 확인은 못했다만."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지금 그 소문이 진짜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게다."
할아버지는 그러면서도 별채 문을 다시 한번 확인하러 갔다. 자물쇠를 흔들어보고, 창문을 하나하나 두드려보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이게 그냥 소문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저녁이 되기 전, 나는 별채 근처를 몰래 지나쳐 봤다. 할아버지 몰래.
발걸음을 최대한 죽였다. 고무신 밑창이 흙을 밟는 소리조차 신경 쓰였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향로와 신상,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낡은 청동 거울이 보였다. 표면에 이끼 같은 얼룩이 있고, 손잡이 부분은 용 문양으로 조각돼 있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오래된 골동품 같았다. 박물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물건.
근데 왜 저런 걸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나는 문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더 들여다봤다. 거울 표면에 뭔가 비친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려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 황급히 몸을 돌렸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냥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린 거였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는 별채에서 멀찍이 떨어져 마당을 가로질러 방으로 돌아왔다.
밤이 다시 왔다.
나는 잠자리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자꾸 던졌다. 낮에 봤던 거울, 발자국, 할아버지의 흔들리던 목소리. 그 모든 게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그 소리를 세다가 몇 번이나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마당 쪽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숫자를 세듯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이불을 걷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밤공기가 서늘했다.
마당 저편, 별채 담벼락을 넘어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담을 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의 손에 삽처럼 생긴 도구가 들려 있었다. 다른 하나는 등에 뭔가 긴 물건을 메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는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할아버지."
나는 낮게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다시, 조금 더 크게.
"할아버지!"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할아버지가 급히 나왔다. 옷차림이 흐트러진 걸 보니 자다가 벌떡 일어난 모양이었다.
"판아, 조용히 해라."
낮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마당을 넘어온 그림자들이 별채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서 뭔가 반짝였다. 도구, 아니 무기 같은 것.
"저 사람들 누구예요?"
"소문이 진짜였구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 조용한 산속 도관에 진짜 위험이 닥쳤다는 걸 실감했다. 낮에 흙을 만지던 할아버지의 손끝이, 아침에 부적을 찾던 그 초조함이 전부 이 순간을 위한 예감이었다는 걸.
그림자들이 별채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쾅.
짧고 둔탁한 소리였다.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안으로 들어가라."
"싫어요."
"판아!"
"할아버지 혼자 두고는 못 가요."
짧은 순간, 할아버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 눈빛 속에서 뭔가 결심 같은 걸 봤다. 평소의 태연함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각오한 얼굴.
"그럼 내 뒤에 있어라. 절대 앞으로 나오지 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까지 떨림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별채 쪽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엔 뭔가 부서지는 소리였다. 나무가 갈라지는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낮은 신음 같은 것도 섞여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별채 안에서 낮고 푸른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깨진 창문 사이로. 마치 그 안에 갇혀 있던 무언가가 이제야 눈을 뜨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