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서연이 다가와 내민 것은 낡은 게임 잡지 한 권이었다.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스카치테이프로 얼기설기 붙여놓은 자국이 눈에 띄었는데, 그게 얼마나 여러 번 들여다본 물건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거, 이터널가든 개발자 인터뷰 실린 거야. 너 관심 있을 것 같아서."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고, 나는 그 잡지를 받아들면서도 왜 그녀가 이런 걸 준비했는지 몰라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표지를 넘기자 낡은 종이 냄새가 훅 끼쳐왔고, 서연은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페이지, 여기." 서연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 "개발자가 캐릭터 디자인 얘기하는 부분인데, 너 예전에 그거 좋아한다고 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며칠 전 쉬는 시간에 지나가듯 흘린 한마디였던 것 같은데, 그걸 서연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고마워."
겨우 짧게 대답하자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는데,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동안 눈으로 좇았다. 그녀의 걸음걸이, 자리에 앉으며 머리를 넘기는 손짓, 옆자리 친구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목소리까지도 이상하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걸.
그날 방과 후, 준혁이 가방을 메며 나에게 슬쩍 다가왔다.
"이서연이 잡지까지 챙겨줬다며?"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냥, 게임 얘기 좀 한 거야."
"그냥이라기엔 눈빛이 심상치 않던데."
준혁이 짧게 웃으며 던진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그가 가방끈을 고쳐 매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데, 그 시선이 마치 내 속을 다 들여다본다는 듯 느껴져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뭐, 아니면 아닌 거고." 준혁이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근데 서연이 그런 애 아니잖아. 아무한테나 그런 거 안 챙겨주는데."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남아서, 나는 신발을 갈아 신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곱씹었다.
왜, 도대체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준혁의 말을 곱씹으며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서울을 떠나온 뒤로 나는 누구와도 깊게 얽히지 않으려 애썼다.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후로 아버지와는 거의 연락이 끊겼다는 사실, 어머니가 낮에는 일을 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날이 더 많다는 사실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조용하고 그림자 같은 존재로 만들어놓았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지나가는 가로수를 세다 보면, 예전 서울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애들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가 금세 흐려지곤 했다. 이사를 온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그 애들이 지어 보였던 표정,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뜸해지다가 결국 완전히 끊겨버린 그 과정을 나는 이미 몇 번이나 겪어본 적이 있었다.
또 그렇게 되겠지.
친구라는 걸 만들려면 그만큼 마음을 열어야 하는데, 나는 그 방법을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마음을 여는 순간 상대가 언젠가는 떠날 거라는 걸 알기에,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고 스스로 다짐해온 시간이 얼마였던가.
그런 나에게 이서연이 먼저 다가온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다가옴이 자꾸만 반복된다는 사실이 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등교했는데, 교실에는 이미 이서연과 한소율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는데, 소율이 서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뭐라 장난스럽게 말하자 서연이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웃음소리가 교실 안에 낮게 울리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걸음을 멈추고 문 앞에서 잠시 서 있었다.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웃는구나.
나에게 보여주던 것과는 조금 다른 표정이었다. 조금 더 느슨하고, 조금 더 익숙한 사이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웃음.
"저 둘,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래." 뒤늦게 들어온 준혁이 내 옆에 앉으며 조용히 알려줬다. "소율이가 전학 왔을 때부터 서연이가 옆에 딱 붙어 있었다던데. 지금도 거의 붙어살아."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시간이 얼마나 단단하게 쌓여 있을지 가늠해보다가, 나와 이서연 사이의 시간이 얼마나 짧고 얕은지를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어 마음이 서늘해졌다. 몇 주짜리 관심과 몇 년짜리 우정을 어떻게 같은 무게로 놓을 수 있을까.
그래도,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짧고 얕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낯설고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는데, 그와 동시에 이 감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함께 밀려왔다.
서연은 나에게 그저 신기한 취향의 동급생일 뿐일 수도 있었고, 소율과의 오랜 관계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는 순식간에 잊힐 수도 있었다. 저 둘 사이에 굳어진 시간 안으로 내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있기는 한 걸까.
수업 시간 내내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나는 선생님의 설명을 절반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노트 위에 의미 없는 낙서만 늘어가는 걸 보며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앞쪽으로, 서연의 뒷머리 쪽으로 향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갈 무렵 담임이 갑작스러운 공지를 전했다.
"다음 주 토요일에 학교 축제 준비 관련해서 반별로 모임이 있을 거다. 조 편성은 오늘 안에 끝낼 거니까 다들 신경 써서 짜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교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벌써부터 친한 애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옮기려는 움직임이 보였고, 몇몇은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조를 확정 짓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이번에도 어디 소속되지 못한 채 혼자 남겨지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늘 그랬으니까.
새로운 반에서 조를 짜는 순간마다 나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남아 선생님이 임의로 배정해주는 자리를 기다리는 쪽이었다. 그 익숙한 소외감이 다시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걸 느끼며, 나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창밖 운동장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순간, 이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야! 여기, 이리 와!"
그녀의 목소리가 교실을 가로질러 곧게 날아왔고, 순간 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