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모의시험이 코앞이었다.
기말고사 전 마지막 점검이라고 담임이 말했다.
전교생이 다 같이 보는 시험이라 등수도 바로 나온다.
"이번에 잘 봐야 감이 잡히지."
담임의 말에 반 아이들이 다 긴장했다.
연필 굴리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누군가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
교실 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나는 별생각 없었다.
항상 1등이었으니까.
1등이라는 자리는 나한테 그냥 익숙한 온도 같은 거였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런데 다은은 달랐다.
시험 전날, 다은이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밤새울 것 같아.]
[왜.]
[모의고사에서 몇 등 안에 들어야 진짜 실력 확인되잖아.]
답을 보내려는데 손이 멈췄다.
다은이 이렇게까지 진지할 줄은 몰랐다.
평소엔 장난기 가득한 문자만 보내던 애였는데.
이모티콘도 없이, 마침표까지 정확하게 찍은 문장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
[내기가 걸려 있는데 어떻게 안 무리해.]
그 말에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워졌다.
내가 던진 조건 때문에 다은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건가.
휴대폰 화면을 몇 번이나 다시 켰다.
뭐라고 더 보내야 할지 몰라서, 결국 아무것도 못 보냈다.
시험 당일, 다은의 눈 밑이 시커멨다.
누가 봐도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
"잠 못 잤어?"
"두 시간 잤나."
"그러다 시험 중에 졸면 큰일이야."
"안 졸아. 커피 마셨어."
다은의 손에 든 캔커피가 세 개나 됐다.
그중 하나는 이미 비어 있었다.
빈 캔을 흔들면 텅, 텅, 소리가 났다.
다은이 그 소리를 들으며 웃었는데, 웃음이 좀 헐거웠다.
"그렇게 마시면 화장실 급해서 시험 망칠걸."
"그건 그때 생각할래."
말은 씩씩했는데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캔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였다.
그걸 보고도 나는 별말을 못 했다.
시험이 시작되고, 나는 평소처럼 문제를 풀었다.
그런데 신경이 자꾸 뒷자리로 갔다.
다은이 잘 보고 있는지, 손이 떨리진 않는지.
한 문제를 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시선이 이미 뒤로 가 있었다.
집중 안 되는 게 이상했다.
시험지 앞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답을 아는데도 손이 늦게 움직였다.
시험이 끝나고 채점이 시작됐다.
담임이 성적을 반별로 붙여놨다.
복도가 순식간에 붐볐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이름을 찾았다.
누구는 소리를 질렀고, 누구는 조용히 뒤돌아 걸었다.
전교 상위권 이름이 쭉 나열됐다.
1등 이준서.
2등, 3등...
다은의 이름은 한참 아래에 있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위였다.
"180등이야."
다은이 성적표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표정이 딱 잘라 말하기 애매했다.
기쁜 것도 같고, 화난 것도 같은.
"340등에서 180등이면 대단한 거야."
"대단한 게 아니라 부족한 거야."
"왜?"
"1등이랑 붙으려면 전교 10등 안에는 들어야지."
그 말에 나도 놀랐다.
다은이 진짜로 1등을 이기려고 하고 있었다.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숫자를 말하는 눈빛이 예전과 완전히 달랐다.
"너 진짜 이길 생각이야?"
"당연하지."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하다가 멈췄다.
다은의 얼굴이 순간 다른 표정을 지었다.
뭔가 숨기는 듯한, 그런 얼굴.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고, 입술이 얇게 다물렸다.
"그냥 이기고 싶어서."
짧은 대답이었는데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그 뒤에 숨겨진 문장이 있는 것처럼.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다은이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날 이후 다은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야자 시간마다 내 옆자리에 슬쩍 앉았다.
"여기 앉아도 돼?"
"자리는 자유잖아."
"그냥 확인."
확인은 무슨.
매번 같은 자리인데 매번 물어보는 게 웃겼다.
근데 그 웃긴 게 자꾸 반복되니까 이상하게 익숙해졌다.
다은이 없는 옆자리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스터디 시간에는 내가 알려준 걸 하나도 안 놓치려고 필기를 세 번씩 다시 했다.
연필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같은 문제를 세 번, 네 번 풀면서도 지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놓치면 손해잖아."
다은의 성실함이 낯설었다.
예전엔 승부만 걸고 도망 다니던 애였는데.
지금은 눈빛이 완전히 달랐다.
문제를 풀 때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버릇도 새로 생겼다.
나는 그 버릇을 보는 게 좋았다.
좋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자꾸 시선을 돌렸다.
하루는 도서관에서 나란히 앉아 문제를 풀다가 다은이 갑자기 물었다.
"너 진짜 강릉 가는 거 싫어?"
"당연히 싫지."
"왜?"
"거긴, 그냥."
말이 안 나왔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목 안쪽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펜을 쥔 손끝을 꾹 눌렀다.
"됐어, 말 안 해도 돼."
다은이 눈치껏 화제를 돌렸다.
그 배려가 고마웠다.
누구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준 적이 없었는데.
그런데 그 순간, 다은의 손끝이 내 손등을 살짝 스쳤다.
둘 다 놀라서 손을 뺐다.
"어, 미안."
"괜찮아."
말은 괜찮다고 했는데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쿵.
손등이 스친 자리가 계속 따뜻했다.
마치 그 자리에 온도가 남은 것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거 뭐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안 나왔다.
다은도 얼굴이 빨개져서 문제집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으면서 계속 같은 줄을 읽는 척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연필로 뭘 쓰는 것도 아니면서 종이를 계속 두드렸다.
그날 이후로 우리 사이에 뭔가 미묘한 게 생겼다.
승부도 아니고, 그냥 라이벌도 아닌.
말로 정리하려고 하면 자꾸 다른 단어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감정.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감정이었다.
정의하려는 순간 도망가버리는, 손에 잡히지 않는 온도 같은 거.
그리고 며칠 뒤, 기말고사가 시작됐다.
교실 앞 게시판에 시험 일정표가 붙던 날, 다은이 나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그 웃음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