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등 했더니 남친이 전학이라니

2화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해놓고 진도가 하나도 안 나갔다. 수학 교과서 첫 페이지를 세 시간째 붙잡고 있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차방정식이라는 단어가 낙서처럼 흐물흐물 풀어졌다. 펜을 굴렸다. 지우개를 굴렸다. 샤프심을 다섯 번쯤 부러뜨렸다. 이준서한테 한 약속. 뭐든 들어준다는 조건. 그걸 걸고 승부를 낸 건 순전히 이번엔 정말 이기고 싶어서였다. - "넌 한 번도 이긴 적 없잖아."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남았다. 맞는 말이라 더 짜증났다. 분한데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제일 짜증나는 거였다. 중학교 때부터 나는 늘 하위권이었다. 공부는 나한테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준서한테는 뭐든 쉬웠다. 1등, 늘 1등. 전교 1등이 아니라 그냥 1등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 애 이름처럼 붙어 다녔다. 그게 얄미워서 매일 승부를 걸었던 건데, 사실은. 아니야. 생각을 끊었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교과서를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아무것도 안 바뀌었지만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나는 이준서 앞에 섰다. 가방도 안 내려놓고 책상 앞에 딱 붙어 섰다. "모의고사 범위 알려줘." "뭐?" "기말고사 범위. 어디부터 어디까지야." 이준서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다. 꼭 세상 신기한 걸 본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진짜 공부할 생각이야?" "내가 언제 장난친 적 있어?" "매번 장난이었잖아."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맞다, 매번 장난이었다. 계단 내기, 급식 내기, 손등 때리기. 다 별거 아닌 걸로 시비 걸었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였다. 왜 진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범위나 알려줘." 이준서가 팔짱을 꼈다.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다." "전 과목?" "학년 1등이니까 전 과목이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전 과목이라는 걸 생각도 안 했다. 5과목을 다 공부한다는 게 어떤 건지 감이 안 왔다. 숫자로만 따져도 다섯 배였다. "할 수 있겠어?" 이준서가 놀리듯 물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게 딱 봐도 재밌어하는 얼굴이었다. "당연하지." 대답은 컸는데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뒤에서 지나가던 짝꿍이 한마디 던졌다. "다은아, 너 어제까지 국사 육대주 왕조 헷갈려 했잖아." "조용히 좀 해." 짝꿍은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갔다. 이준서는 그걸 다 듣고도 아무 말 안 했다. 그게 더 얄미웠다. 담임 상담 시간에 성적표를 받았다. 전교 380명 중 340등. 숫자를 보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숫자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를 찌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서다은, 요즘 무슨 일 있어?" 담임이 물었다. "아니요." "갑자기 학습계획서를 써달라고 해서." 그건 내가 며칠 전에 부탁한 거였다.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 서류를 손에 쥐고 교무실 문을 두드릴 때 내 손이 이상하게 뜨거웠던 게 기억났다. "그냥, 목표가 생겨서요." 담임이 웃으며 계획서를 내밀었다. 야간자율학습 신청, 방과후 보충, 스터디 그룹. 칸이 세 개나 있었다. 나는 다 체크했다. 펜 끝이 종이에 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담임이 서류를 훑어보다 한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다 신청한 애는 처음 본다." "열심히 하려고요." "이준서 때문이야?"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기만 했다. 담임은 더 캐묻지 않고 서류를 챙겼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책상 앞에 앉았다. 형광펜 색깔조차 낯설었다. 분홍, 노랑, 초록, 뭘 어디에 써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색깔만 예뻤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몰라서 인터넷에 '고등학교 내신 공부법'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가 수백 개였다. 다 다른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누구는 요약노트를 만들라고 했고 누구는 문제집만 반복해서 풀라고 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답이 안 나왔다. 이준서를 이기고 싶어서.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없다고 하기엔 뭔가 마음이 걸렸다. 손끝을 꾹 눌러봤다. 찬 손이 조금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온도가 뭔지 모르겠어서 더 신경이 쓰였다. 다음 날, 나는 처음으로 야간자율학습에 남았다. 교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낯설었다. 창밖은 이미 까맸다. 평소라면 학원 버스에 타고 있을 시간이었다. 한 자리 건너에 이준서가 앉아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지정석처럼. "너도 남았어?" "나는 매일 남아." "아, 그렇지."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펜 소리만 사각사각 났다. 누가 종이 넘기는 소리, 형광등이 미세하게 웅웅거리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나는 문제집을 이준서 쪽으로 슬쩍 밀었다. "이거 모르겠는데." 이준서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왜 알려줘야 돼." "라이벌끼리 정정당당하게 하려고 그러지." "그게 무슨 논리야." "몰라, 그냥 알려줘." 이준서가 한숨을 쉬더니 결국 문제집을 끌어당겼다. 연필로 몇 개를 표시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친절해서 놀랐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낮고 차분했다. "이 부분은 공식만 외우면 돼." "어떻게 외워?" "반복해서 풀면 외워져."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 실소가 나왔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연필 끝이 종이를 긋는 모습을 나도 모르게 계속 쳐다봤다. "뭘 봐." "안 봤어." "봤잖아." "내 마음이야." 이준서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괜히 신경 쓰여서 나는 얼른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집중이 그렇게 오래간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평소라면 삼십 분도 못 버텼을 텐데. 그런데 며칠 뒤, 반 아이 하나가 지나가듯 말했다. "준서 성적 떨어지면 강릉 내려간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게 뭔 소리야?" "아버지랑 약속했대. 1등 못 하면 전학이래."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까 그 온도, 조금 따뜻해졌던 그 온도가 순식간에 다시 얼어버렸다. 그럼 내가 지금 하려는 게. 이길 수도 있는데,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거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런 걸 알기 전에는 그냥 이기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다. 일단 이 사실을 이준서한테 물어야 했다. 교실 문 쪽을 쳐다봤다. 이준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창가 자리에 앉아 펜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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