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성적 떨어지면 강릉 내려간다는 거 진짜야?"
다은이 다짜고짜 물었다.
야자 시간, 교실 뒷자리였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다은의 얼굴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표정이 심각해서 순간 대답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누가 그래?"
"반 애들이."
소문이 벌써 다 퍼졌구나.
숨을 한 번 내쉬었다.
교실 안을 슬쩍 둘러봤다.
다들 문제집에 코를 박고 있었지만, 어딘가 귀는 이쪽을 향해 있는 느낌이었다.
"진짜야. 아버지랑 약속했어. 1등 유지 못 하면 강릉 내려가서 학교 다녀야 해."
다은의 얼굴이 굳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펜을 쥔 손끝이 살짝 하얘졌다.
"그럼 내가 내기에서 이기면."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길 리 없잖아."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다은이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340등짜리가 몇 달 만에 1등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수학적으로 봐도, 물리적으로 봐도, 그냥 상식적으로 봐도.
"그래도."
"됐어. 이 얘기 그만하자."
다은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침묵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그날 이후로 다은이 이상하게 진지해졌다.
야자를 매일 신청했고, 문제집을 세 개나 더 샀다.
쉬는 시간에도 책상에 엎드려 자던 애가, 이제는 그 시간에 오답노트를 펼쳤다.
주말에는 학교 앞 카페에서 스터디를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쟤 저러다 쓰러진다."
현우가 옆에서 걱정하듯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하겠어."
"뭘 알아서 해. 네가 도와줄 것도 아니잖아."
그 말에 답을 못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나는 다은이 밤늦게까지 헤매는 문제를 슬쩍 봐주고 있었다.
대놓고 도와준다고 하면 다은이 이상한 표정을 지을 게 뻔해서, 그냥 지나가는 척 힌트를 흘렸다.
"그 유형은 작년 기출에도 있었어."
"어느 페이지?"
"찾아봐."
그러면 다은은 진짜로 밤새 그 페이지를 찾아냈다.
다음 날 눈이 새빨갰다.
그런데도 표정은 이상하게 밝았다.
뭐가 저렇게 재밌나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 노력이 신경 쓰였다.
자꾸 눈이 다은 쪽으로 갔다.
집중하려고 문제집을 봐도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왔다.
이게 뭐지.
아니야, 그냥 신기해서 보는 거야.
셋째 시간쯤엔 나 자신에게 하는 변명도 슬슬 지겨워졌다.
일주일 뒤, 담임이 학급에 스터디 그룹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네 명씩 조를 짜서 서로 가르쳐주는 방식이었다.
조 편성표를 확인했다.
서다은, 이준서, 박현우, 김지윤.
"어, 같은 조네."
현우가 반가운 듯 웃었다.
다은은 표정 관리를 하려는 듯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걸 봤다.
그리고 그걸 봤다는 사실이 또 신경 쓰였다.
스터디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방과후 도서관에서 진행됐다.
넷이 앉으면 딱 맞는 창가 쪽 테이블이었다.
햇빛이 늦게까지 남아서, 오후엔 다은의 옆머리가 노랗게 빛났다.
첫날, 다은이 수학 문제를 세 시간째 풀지 못하고 있었다.
지윤이 몇 번 설명해줬지만 다은은 이해 못한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이 항을 이렇게 옮기면—"
"아, 어, 그렇구나."
전혀 이해 못한 표정이었다.
지윤도 그걸 아는지 한숨을 살짝 쉬었다.
결국 내가 끼어들었다.
"여기, 이 부분 그림으로 그려보면 쉬워."
간단한 도형을 그려주자 다은의 눈이 커졌다.
"아, 이게 이거였어?"
"어. 계속 헷갈리던 거 맞지."
"어떻게 알았어?"
"네가 그 유형에서 매번 같은 실수를 하니까."
다은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러다 픽 웃었다.
"관찰력 좋네."
"관찰한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거야."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딱딱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좀 크게 나온 것 같아서 스스로 당황했다.
지윤이 옆에서 눈치를 챈 듯 웃음을 참았다.
"둘이 그냥 사귀지 그래."
"뭔 소리야."
"아니야, 아니야."
다은과 나는 동시에 손을 흔들며 부정했다.
타이밍이 겹쳐서 서로 눈이 마주쳤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현우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방금 그거 봤냐. 완전 똑같이 흔들었어."
"박현우."
"왜, 사실인데."
지윤이 옆에서 소리 없이 웃다가 결국 터졌다.
다은은 얼굴이 빨개져서 문제집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펜만 돌렸다.
그날부터 나는 정식으로 다은의 문제집을 봐주기로 했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내가 도와주는 건 스터디 시간에만이야. 승부에는 상관없어."
"알겠어."
"그리고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왜?"
"그냥."
사실 이유가 있긴 있었다.
다은을 돕는 게 알려지면 내가 일부러 봐줬다는 오해가 생길까 봐.
승부에서 진 게 실력이 아니라 배려로 보일까 봐.
그런데 정작 걱정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은과 함께 있는 시간이 자꾸 길어지고 있었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문제집을 펼쳐놓고 설명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문제보다 다은의 표정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집중하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몰라도 됐을 정보였는데.
그날 밤, 스터디가 끝나고 도서관을 나서는데 다은이 물었다.
"왜 이렇게 잘 도와줘?"
"그냥 네가 답답해서."
"거짓말."
"진짜야."
다은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작은 눈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깊어 보였다.
가로등 불빛이 다은의 얼굴에 얇게 걸려 있었다.
"고마워."
짧은 말이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 뛰었다.
뭐야, 이거.
숨을 살짝 참았다가 다시 내쉬었다.
겨우 두 글자짜리 말에 왜 이렇게 반응하는 건지 나 자신도 이해가 안 됐다.
애써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다은의 발소리가 따라왔다.
작은 발소리인데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교문을 나설 때까지 그 발소리는 계속 내 귀에 남았다.
집에 가는 길, 가로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그 그림자를 밟으면서, 계속 아까 그 목소리를 되풀이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고마워.
별거 아닌 말인데, 왜 자꾸 생각나는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확히 뭐가 안 되는 건지는 나도 몰랐다.